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에서 세 모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김태현(25)이 2차 공판에서도 “(피해자 A씨의) 가족까지 살인한 건 우발적이었다”고 거듭 주장했다. 경찰 조사 당시 “가족 모두 살해하려 계획했다”는 진술을 번복한 것인데, 김태현은 검찰 측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경찰의 모든 질문에 ‘그렇다’고 말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김태현의 변호인은 경찰 조사 당시 진술 내용 모두 증거에서 제외해달라고 요청했다.
서울북부지법 형사13부(부장판사 오권철)는 29일 살인·절도·특수주거침입 등으로 기소된 김태현의 2차 공판을 열었다. 이날 김태현은 황토색 반팔 수의와 투명 페이스실드(얼굴 투명 가림막)를 착용하고 법정에 들어섰다. 재판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재판부가 “손목에 난 상처를 보여달라. 자해흔이냐”고 묻자 자리에서 일어나 손목을 보여주며 “그렇다”고 답했다.
이날 검찰은 김태현 측이 주장하는 ‘우발성’을 부인할 수 있는 증거 설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김태현의 지인이었던 피해자 A씨의 가족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찾아갔고 남자 가족이 없는 시간을 골랐으며 “가족이 범행에 방해가 된다면 살해할 의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전문가 심리 분석을 근거로 계획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단했다.
검찰 조사 당시 검사가 김태현에게 “가족을 살해하지 않고 A씨를 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냐”는 질문을 던지자 “그건 어려웠을 것”이라고 답했다는 점과 “오후 시간에 집에 가면 남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간 것 아니냐”는 물음에는 “남자가 있었어도 제압했을 것”이라고 답했다는 점도 지적했다. 가족이 아무도 없는 시간을 골랐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고, 가족에게도 해를 끼칠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또 “가족까지 살해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추궁에는 “배신감과 상처가 커서 범행을 저질렀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응어리가 커져서 결국 터졌다”는 진술을 내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범행 동기는 친밀한 사이라고 여겼던 A씨가 자신을 험담하고 다닌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봤다. 김태현이 범행 후 가장 먼저 한 행동이 A씨의 휴대전화에서 자신과 함께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의 대화 내용을 확인한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검찰은 김태현이 정신질환 병력은 없지만 자기과시적이고 편집증적 집착이 있는 것으로 봤다. 또 범죄행위를 통해 보복 심리를 충족하려 시도하고 강한 통제감 탓에 대인관계를 맺기 어려워하는 등의 반사회적 성향을 확인했다.
이날 재판에서 김태현 측 변호인은 범죄의 우발성을 강조했다. 그는 “가족은 살해하지 않고 제압할 의도였다”며 “청테이프는 살해 목적이 아닌 제압 용도였다”고 주장했다. 또 “오후 5시35분에 집에 침입하고도 한 시간 뒤 첫 살인이 일어났다는 점은 피해자가 반항해 우발적으로 살해했다는 의미”라며 “범행 후 도주하지 않고 자해를 시도했다는 점, 사이코패스 점수는 17점으로 재범 위험성은 ‘중간’ 정도라는 점을 참작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태현은 지난 3월 23일 온라인게임을 통해 알게 된 A씨 집에 택배 기사로 위장한 후 찾아가 A씨 여동생과 어머니를 먼저 살해한 후 귀가한 A씨까지 살해했다. 검찰은 김태현이 과도나 청테이프 등 범행에 사용할 도구와 범행 후 갈아입을 옷을 준비했고, A씨 휴대전화에서 범행 증거가 될 대화 내용을 지웠다는 점 등을 토대로 치밀한 계획범죄로 보고 있다. 3차 공판은 다음 달 19일 오전 10시로 예정됐다. 검찰은 피해자 유족을 양형증인으로 신청하고 김태현에게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청구 여부를 검토할 계획이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