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년전 급히 묻은 항아리서 조선 초기 활자 1600점 우르르

입력 2021-06-29 11:30 수정 2021-06-29 16:10
서울 인사동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금속활자. 문화재청

지난 6월 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79번지 금강제화 뒤편. 조선시대 피맛길로 불렸던 좁은 골목 북편의 공평구역 제15·16지구 유적을 발굴 중이던 (재)수도문물연구원 연구원들은 쾌재를 불렀다. 땅속에서 잘려진 총통이 나오더니 동종이 보였다. 총통 옆에 절반이 깨진 항아리가 있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금이 간 틈으로 공기 돌 같은 게 툭 떨어졌다. 씻어보니 금속활자가 아닌가. 발굴을 지휘한 오경택 원장은 “긴급하게 항아리를 수습해서 조사하니 금속활자 1600점이 들어있었다”며 “제 인생에 다시 만나기 힘든 발굴 성과”이라며 감격스러워했다.

29일 오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본관 강당에서 열린 서울 공평동 유적 출토 중요유물 언론공개회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등이 공개되고 있다. 연합뉴스

문화재청은 29일 수도문물연구원과 함께 고궁박물관에서 공평구역 유적 발굴 성과를 공개했다. 공평유적은 조선시대 생활지층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곳으로 이들은 16세기 지층의 집터 내부를 발굴 조사하던 중이었다. 건물지는 관가 건물이 아닌 시전 관련 중인들이 살던 집터다.

'훈민정음' 금속활자 등 중요 유물 쏟아진 피맛골. 문화재청

이곳에서는 조선 전기에 제작된 금속활자 1600점과 세종∼중종 때 제작된 물시계의 주전(籌箭·물시계외 시보를 연결하는 부위)을 비롯해 세종 때 만들어진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 (日星定時儀) 1점, 중종~선조 때 만들어진 총통(銃筒)류 8점, 동종(銅鐘) 1점 등의 금속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금속활자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라는 점에서 주목이 된다. 현재까지 전해진 가장 이른 조선 금속활자인 세조 ‘을해자(1455년)’보다 20년 이른 세종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활자가 다량 확인된 점은 유례없는 성과다.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갑인자로 추정되는 이 활자가 추후 연구를 통해 ‘갑인자’로 확인이 되면 금속활자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실물자료가 된다”며 “구텐베르크의 인쇄시기(1450년경)보다 이른 시기의 조선시대 금속활자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금속활자는 서체, 한글표기, 크기, 형태 등으로 봐서 최소 5종 정도가 혼합됐다. 15세기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 박팽년 등이 조선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운서(韻書)인 동국정운식 활자도 처음 실물이 확인이 됐다. 전해지는 예가 극히 드문, 어조사 역할을 한 연주활자(連鑄活字)도 10여 점 출토됐다.

이승철 유네스코국제기록유산센터 팀장은 “조선 전기 다양한 크기의 한글 금속활자의 실물이 출토된 최초의 사례”라며 “인쇄본으로만 남아 있던 활자의 실물이 확인돼 한글 창제의 실제 여파와 더불어 활발하게 이루어진 당시 인쇄활동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서울 인사동의 금속활자 등 유물 발굴 모습. 문화재청

항아리에서는 세종~중종 때 제작된 자동 물시계의 주전으로 보이는 동제품들이 잘게 잘린 상태로 나왔다. ‘세종실록’에서 작은 구슬을 저장했다 방출해 자동물시계의 시보(時報)장치를 작동시키는 장치인 주전의 기록과 일치한다. 주전은 1438년(세종 20년)에 제작된 흠경각 옥루이거나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의 새로 설치한 보루각의 자격루로 추정되며,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조선시대 자동 물시계의 주전 실체가 처음 확인된 것으로 의미가 크다.

항아리 옆에서 나온 일성정시의는 낮에는 해시계로, 밤에는 별자리를 이용하여 시간을 가늠한 용도로 사용된다. 세종은 4개의 일성정시의를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세종대의 과학기술의 실체를 확인한 것이라 의미가 크다.

소형화기인 총통은 승자총통 1점, 소승자총통 7점 등 총 8점이다. 완형의 총통을 고의적으로 절단한 후 묻은 것으로 보인다. 복원된 크기는 대략 50~60cm이다. 총통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계미(癸未)년 승자총통(1583년)과 만력(萬曆) 무자(戊子)년 소승자총통(1588년)으로 추정됐다. 장인 희손(希孫), 말동(末叱同) 제작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장인 희손은 현재 보물로 지정된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차승자총통’의 명문에서도 이름이 확인된다. 동종은 일성정시의의 아랫부분에서 여러 점의 작은 파편으로 나누어 출토되었다. 두 마리 용 형상을 한 용뉴(龍鈕)도 있고 몸통에는 연꽃봉우리, 잔물결 장식이 있는 등 15세기 왕실이 후원하던 동종의 양식을 계승했다.

서울 인사동에서 금속활자 등 유물이 발굴되는 모습. 문화재청

출토된 유물들은 금속활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잘게 잘라 파편으로 만들어 도기항아리 안과 옆에 묻어둔 것으로 추정된다. 만력(萬曆) 무자(戊子)년에 제작된 소승자총으로 미뤄 1588년 이후에 묻혔다가 433년만에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누가 무슨 사연으로 이 활자와 총통 등을 항아리에 묻고 갔을까. 오경택 원장은 “동은 조선시대 아주 비쌌다. 총통 등이 고의적으로 절단돼 묻혀 있는 것으로 봐서 급박한 상황에서 묻었다가 꺼내지 못한 것 같다”며 “임진왜란 등 전란이 있었던 16세기 유물 등에서 이런 식으로 묻은 경우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