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감독 등의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세상을 등진 철인3종경기 국가대표 고(故) 최숙현 선수를 기억하는 이들이 최 선수 사망 1주기를 맞아 자전거에 오른다. 동료에 대한 그리움과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을 한 송이 꽃에 담아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24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최 선수 1주기를 하루 앞둔 25일 15인의 철인들은 서울 반포한강공원에서 추모 라이딩에 나선다. 10년 넘게 철인3종경기를 즐겨온 동호인부터 현직 프로선수까지 면면은 다양하다. 이들은 반포한강공원에서 출발해 경기도 하남시 신장동 덕풍교를 찍고 돌아오는 54㎞ 코스를 자전거로 달리며 최 선수를 추모할 예정이다. 철인3종경기 세 종목(수영·사이클·마라톤) 중 하나인 사이클을 타면서 최 선수가 못 다 이룬 꿈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겠다는 뜻에서다.
철인들의 유니폼 뒷주머니에는 국화 한 송이가 꽂힌다. 이날 행사는 오영환(42) 전 철인3종경기 주니어 국가대표팀 감독이 기획했다. 오 감독은 지난해 7월에도 추모 라이딩을 제안했는데 당시 40여명의 동호인들이 모여 체육계 폭행·폭언의 병폐를 지적했다.
최 선수 사망 이후 그가 경주시청 소속이던 2017·2019년 감독·운동처방사·선배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올해는 최 선수 사망 직후였던 지난해보다 규모는 조촐하지만, 최 선수를 잊지 않고 기억하자는 데 더욱 초점을 맞췄다는 게 오 감독의 설명이다.
오 감독은 24일 “최숙현 선수에게 미안함이 커서 1주기 행사를 더욱 크게 하고 싶었는데 코로나 상황에서 여러 고민이 됐다”며 “그래도 우리가 매년 추모 라이딩을 하면 체육계 악습이 조금은 없어지지 않을까 싶어 올해는 물론이고 내년에도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오 감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 받는 꿈나무 선수들에게도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최 선수가 청소년 대표 시절 지도자로 인연을 맺은 박찬호(53) 부산시체육회 철인3종경기팀 감독도 오는 26일 경북 성주군 추모공원을 찾는다. 박 감독은 “내가 마지막으로 지도했으니까 숙현이 생각이 나곤 한다”며 “(숙현이에게) 농담도 건네고 반려견 모임도 함께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체육계에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우리가 숙현이를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선수의 아버지 최영희(57)씨는 딸을 잊지 않은 철인들 덕분에 위안을 얻는다고 했다. 최씨는 “올해도 추모 라이딩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동호인, 선수들이 숙현이를 잊지 않고 함께 슬퍼하고 뜻을 기려줘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다만 최씨는 지난 1년이 어땠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잘 버텼다”고 겨우 답한 뒤 “‘그 사람들 죄를 밝혀달라’는 숙현이 바람대로 죗값을 치르게 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렇게 1주기를 맞았다”고 지난 1년을 돌이켰다.
지난 1월 대구지법은 1심에서 김규봉 전 감독에 징역 7년, 안주현 운동처방사에게 징역 8년, 장윤정 전 주장에 징역 4년, 김도환 전 선수에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인권침해 재발 방지와 표준 근로계약서 제정 등을 담은 ‘최숙현법’(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도 만들어졌다. 체육계 최초로 산업재해로 인정받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경주시청에서 함께 뛰던 김모(32) 선수가 팀 내 폭행을 증언한 최숙현의 동료 2명에게 4억원대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논란이 불거졌다. 3년 전 사이클 훈련 때 둘의 과실로 부상을 입었다는 것인데 보복성 소송이라는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자식을 잃은 아비의 고통은 계속되지만, 최씨는 딸을 위해 더욱 힘을 내려고 한다. 그는 “TV를 켜면 체육계에서 비슷한 사고가 자꾸 터지더라고요. 그때마다 숙현이 생각이 많이 나죠. 얼마나 힘들었으면 지 몸 하나 던져 저래 억울함을 풀라 그랬겠노 싶은 생각이 커요”라며 “먼 훗날 대중의 관심이 사그라질지라도 딸을 기억하고, 뜻을 기릴겁니다”라고 말했다.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