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성희롱 피해 여경 “경찰서장은 경고만? 화가 난다”

입력 2021-06-23 17:56 수정 2021-06-23 21:39


경찰청 진상 조사 결과 강원 태백경찰서 소속 경찰관 12명이 한 여경을 상대로 성희롱을 일삼고 2차 가해까지 벌인 사실이 확인됐다. 피해 신고가 이뤄지고 난 뒤에도 가해자와 분리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고 진상규명이 늦어지면서 경찰 대처가 2차 가해를 조장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피해 여경은 동료 경찰관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고 사건 관련자 전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국민일보가 23일 입수한 경찰청 인권조사계 진상조사 결과에 따르면 태백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은 피해 여경을 상대로 수차례 성희롱하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A경위는 순찰차 안에서 “안전벨트를 대신 매달라”라며 신체 접촉을 유도한 사실이 드러났다. B경감은 “얼굴도 풍속같이 생겼네”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풍속 담당’ 직원이 유흥업소 등을 단속하는 점을 고려하면 ‘유흥시설 종사자’를 염두에 두고 한 발언으로 보인다. 또 정년 퇴직한 간부가 “커피도 안 타고 싸가지가 없다”고 한 적도 있었다. 피해 여경은 앞서 내부 폭로 글에서 “‘나는 성적 노리개인가’라는 생각에 너무 화가 나 많이 울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피해 여경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중심의 류재율 변호사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피해자가 가장 원했던 것은 가해자와의 분리 조치와 성희롱에 대한 진상 규명이었는데, 이를 담당해야 할 직장협의회가 오히려 피해자를 공격하는 듯한 글을 올리고 분리 조치 요구가 묵살되는 등 사실상 태백서 전체가 가해자였다”고 말했다. 류 변호사는 “경찰청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2차 가해에 나섰던 직협 관계자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성희롱 사건과 관련된 태백서 관련자 전원에 대해 민사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피해 여경은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할 경찰서장과 감찰 파트에 징계가 아닌 경고 조치만 내려진 것에 화가 난다”고 말했다.

피해자는 지난해 9월 처음으로 태백경찰서 청문감사실에 성희롱 등 비위 사실을 신고했다. 태백서는 일부 비위 사실을 확인해 상급 기관인 강원경찰청 청문감사실에 보고했고, 경찰청 인권조사계에도 해당 내용이 전달됐다. 하지만 가해자와의 분리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피해자는 강원경찰청과 본청(경찰청)에도 분리 조치를 요구했다. 이듬해 2월 정기 인사를 통해 피해자는 다른 경찰서로 전보됐는데, 최초 신고로부터 약 5개월이 지난 뒤였다. 이에 대해 경찰청 관계자는 “문제가 된 발언의 진위 여부를 검증하던 과정이었고, 같은 경찰서라도 업무상 공간이 분리돼있어서 매뉴얼상 문제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피해 여경은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일부 가해자들이 무혐의 처분을 받자 지난 3월 직접 피해 사실을 알렸다. 경찰 내부망인 폴넷에 ‘전 지금 살고 싶지 않습니다. 도와주세요’라는 제목의 성희롱 폭로 글을 실명으로 올렸다. A4용지 25쪽 분량으로 작성된 피해 내용에서 해당 여경은 태백경찰서에서 순경으로 임용된 뒤 겪은 성희롱 사례를 언급했다.

피해 사실 폭로가 이어지자 내부 직원들은 반발하고 피해자를 모함했다. 태백서 직장협의회는 “태백경찰서의 명예가 실추됐다” “일방의 주장만 믿고 무조건적으로 태백경찰서 직원들을 비난하는 모욕적인 댓글을 멈춰달라” 등의 글을 내부망에 올렸다. 피해 사실에 대한 진상 조사는 뒷전이었다.

언론을 통해 해당 사실이 알려지자 그제서야 경찰청도 진상 조사에 속도를 냈다. 조사 결과 경찰청은 해당 내용들이 대부분 사실임을 확인했다. 경찰청은 12명의 경찰관에 대해 징계 조치를, 4명의 경찰관에게 직권 경고를 하도록 강원경찰청에 지시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명예훼손 사건이 있어 진상 조사가 잠시 중단된 측면이 있다”며 “무혐의 처분과는 별도로 경찰청은 성희롱이 있었다고 판단해 징계를 권고했다”고 설명했다.

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