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재활용 문제의 대안 중 하나로 ‘리필 상점’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화장품의 내용물만 구입할 수 있도록 해 포장재와 용기 소비 자체를 줄이도록 한 것이지요. 본품을 새로 사는 것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소비자가 딱 필요한 만큼만 구매할 수 있어 경제적입니다. 이번 주 [에코노트]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알맹상점’에서 화장품 ‘89g’을 사온 경험을 나눠보려 합니다.
‘알맹이만 판다’는 의미의 알맹상점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화장품과 세제 리필을 시작한 제로웨이스트숍입니다. 망할 것을 각오하고 문을 연 지 1년, 이제는 ‘우리 것도 팔고 싶다’는 브랜드의 제안을 모두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인기 상점이 되었지요. 가게를 찾은 지난 17일에는 평일 오후인데도 손님 10여명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한쪽에 주르륵 나열된 벌크(대용량 포장) 제품은 가짓수가 꽤 많아 보였는데요. 토너나 로션뿐만 아니라 세럼, 수분크림, 자외선차단제 같은 기능성 화장품까지 품목이 다양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화장품 입점 브랜드는 10~12개 정도인데 친환경 화장품 용기로 주목받는 아**** 브랜드가 대표적입니다.
이용방법은 간단합니다. 저울에 용기를 올려두고 무게를 ‘0’으로 맞춘 뒤 원하는 만큼 내용물을 받아 다시 무게를 잽니다. 이후 제품명과 g당 가격, 유통기한 등을 메모한 뒤 계산하면 되죠. (철저한 소비자 양심 시스템입니다)
가격은 g당 10원~300원 정도입니다. 화장품을 무게에 따라 사본 적이 없다 보니 ‘g당 얼마’라는 가격표가 한번에 와닿지 않았는데요. 되도록 조금씩 담아 여러 번 재야 예산 초과를 막을 수 있습니다.
저는 다 쓴 보디로션 용기에 새 보디로션을 담아왔습니다. 어색한 손놀림으로 펌프질을 다섯 번 했더니 89g이 나왔습니다. 그제야 제가 너무 큰 통을 가져왔다는 생각이 들었죠. 적당한 크기의 용기가 여러 개 있다면 조금씩 종류별로 담을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실제로 10g씩 여러 제품을 써본 뒤 자신에게 맞는 걸 찾아 구입하는 고객이 많다고 합니다.
화장품을 담기 전에는 용기 내부가 완전히 말라 있는지, 육안으로 보이는 이물질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가게에서 세척한 뒤 살균건조기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미처 용기를 가져오지 못했다면 사람들이 기부한 용기를 사용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막상 집에서 용기를 찾아보면 세척하기 쉬운 형태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입구가 너무 좁거나 내용물을 보기 힘든 불투명한 디자인이 많으니까요. 리필 상점이 활성화된다면 화장품 용기를 만드는 단계부터 큰 변화가 생겨나겠지요.
알맹상점을 준비할 당시엔 화장품이나 세제를 대용량으로 공급받는 것조차 어려웠다고 합니다. 기업들이 벌크 제품을 제작하지 않는데다, 판매 과정에서 위생이나 품질 문제가 발생할지 몰라 공급을 꺼렸다고 하네요.
알맹상점의 고금숙·양래교·이주은 공동대표는 ‘우리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업체들을 설득했습니다. 그 노력이 소비자 구매로 이어지면서 기업의 시선도 완전히 달라졌지요. 고객들 사이에선 남성 화장품이나 색조 화장품 등 지금보다 다양한 제품을 ‘리필’하고 싶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알맹상점은 재활용되지 않는 우유팩·테트라팩, 플라스틱 병뚜껑을 가져오면 휴지나 치약짜개로 만들어 재사용하는 ‘회수센터’의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찻잎이나 파슬리 가루, 올리브유처럼 원하는 만큼만 사고 싶었던 식품도 리필이 가능합니다. 그저 “즐겁고 재밌어서” 제로웨이스트숍을 운영하고 있다는 고 대표는 이러한 개인의 실천이 모여 시스템의 변화를 만들어낸다고 말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는 개인의 의미가 굉장히 강조된 사회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제로웨이스트숍이나 자원순환 역할을 하는 동네 거점이 굉장히 빠르게 생겨나고 있어요. 화장품 어택 같은 시민운동은 기업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고요. 석유 화학 산업이 워낙 거대하기 때문에 거기에 부딪히면 절망적일 때도 있지만, 개인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20평 남짓한 작은가게에서 올해 1~5월 알맹상점에서 판매한 화장품 용량은 1151ℓ, 세제 용량은 1740ℓ입니다. 100㎖ 용기로 따진다면 플라스틱 용기 2만8910개를 절감한 셈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화장품을 소분 판매하기 위해 ‘맞춤형 화장품 조제 관리사’라는 전문 자격증이 필요한데요. 정부는 이러한 자격증 기준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아들이고 올해 내에 규제를 완화할 방침입니다. “화장품 리필하러 간다.” 이 말이 흔하게 쓰일 날도 머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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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
[에코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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