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민주화운동 기간에 총탄에 맞고 숨진 뒤 ‘무명열사 묘역’에 안장됐던 30대 남자가 41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다. 다른 희생자 가족들이 장례를 치른 무명의 남자는 DNA 분석을 통해 어렵사리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아래 조사위)는 15일 오후 국립5·18민주묘지 세미나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무명열사 망월 묘역’에 안정된 5기의 유골 가운데 1기(묘 4-90)의 신원이 신동남(당시 30세) 씨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신 씨는 1980년 5월 20일 총상을 입고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다음날 숨졌다.
영안실에 잠시 안치됐던 신 씨의 시신은 시민수습대책위가 전남도청으로 옮겼는데 이때 연락이 끊긴 아들을 찾고 있던 한 어머니가 신 씨를 자기 아들 이금영 씨로 잘못 알고 유해를 넘겨받아 장례까지 치렀다. 이후 신 씨 시신은 이 씨로 착각한 유족들에 의해 망월 묘역에 안장됐다.
그런데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졌다. 행적이 묘연했던 이 씨가 한 달도 되지 않아 살아 돌아온 것이다. 장례까지 치렀던 신 씨 묘는 이름 없는 묘로 한동안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신 씨의 주검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 신 씨 가족들은 5·18이 불순세력에 의한 ‘광주사태’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게 되자 “적십자병원에서 시신이 사라졌다”며 행방불명자로 광주시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그동안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행방불명자로 인정받지 못해왔다.
5·18 조사위는 지난해 11월 첫 현장조사 일정으로 망월 묘역 무명열사 묘 5기 중 3기(묘지번호 4-90, 4-93, 4-97)에서 3기의 뼛조각 채취와 함께 DNA 대조작업에 들어갔다. 이후 5·18 당시 행방불명자 가족 등이 혈액 채취에 참여해 전남대 법의학교실에 보관 중인 DNA와 비교하는 신원 확인 작업을 벌여 신 씨의 가족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5·18 조사위는 최초 망월 묘역 무명열사 묘는 모두 11기였지만 이 중 6기가 그동안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해 이른바 ‘구묘역’으로 불리는 망월 묘역에는 5기만 남아 관리됐다고 설명했다. 6기의 무명열사 묘는 2001년 10월 현재 위치인 국립 5.18 민주묘지로 이장을 앞두고 신원이 파악됐다.
5·18 조사위가 5·18 이후 41년 만에 묘 5기 중 1기의 신원을 신 씨로 확인하면서 무명열사 묘는 4기만 남게 됐다. 5·18 조사위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행방불명자만 82명(448건 신청 중 중복 제외 242명 신청)에 달한다고 밝혔다.
5·18 조사위 송선태 위원장은 “5·18 민주화운동 기간 중 홀연히 사라진 이들의 행방을 찾기 위한 신원확인과 함께 암매장 관련 조사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