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2년생 독자도 아들 미역국 끓인 어머니도 ‘참변’

입력 2021-06-10 13:47 수정 2021-06-10 16:14

“늦게 퇴근하는 엄마 냄새를 맡겠다고 침대 위 베개와 이불을 껴안기 좋아하던 살가운 아들이었어요.” “법원 앞에 개업한 곰탕집 손님이 줄었다고 하소연하시더니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실 줄 미처 몰랐습니다.”

9일 오후 광주 학동 재개발구역 철거건물 붕괴참사로 숨진 9명의 애절한 사연이 주변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학창시절 추억을 쌓아가던 17세 고교2년 남학생부터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76세 할머니까지 119구조대가 콘크리트 더미에 깔린 시내버스에서 끄집어낸 사망자들은 하나 같이 누군가에게 소중한 가족이었고 건강하게 삶을 꾸리던 우리의 평범한 이웃이었다.

하지만 상상조차하기 힘든 청천벽력의 철거건물 붕괴참사로 허망하게 생을 마쳤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수업인데도 재학 중인 학교에서 동아리 후배들을 만나고 귀가하던 A(17)군이 아버지와 마지막 전화통화를 한 시간은 붕괴참사 불과 20여분전인 9일 낮 4시쯤.

철거건물 붕괴참사 희생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A군은 어머니가 30대 후반에 낳은 늦둥이자 2대 독자로 어릴 때부터 집안 가족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A군은 “이제 버스타고 집으로 간다”고 아버지와 휴대전화로 통화한 게 꽃을 피우지 못한 짧은 생의 마지막이 됐다.

동아리모임이 끝난 후 평소처럼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A군은 집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콘크리트와 흙더미에 묻혀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다가 끝내 돌아올 수 없는 저 세상으로 떠났다.

이따금 침대 위 베개와 이불에서 향기로운 ’엄마 냄새’가 난다며 애교를 부리던 아들을 애타게 찾아 헤매던 A군 부모는 9일 밤 참사현장 시내버스 내부에서 메고 있던 가방과 함께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있던 아들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끝내 오열했다.

음악가를 꿈꾸던 10대 고교생은 ‘남·10대'이라고 적힌 사고대책본부 현황판의 최종 9번째 사망자로 마지막 흔적을 남겼다.

손자 손녀 재롱에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낼 나이인 B씨(65·여)는 함께 사는 큰 아들의 생일날 자신의 집을 불과 두 정류장 남겨두고 버스에서 내릴 준비를 하다가 불귀의 객이 됐다.

코로나 확산 이전인 2년 여 전 광주지법 앞에 곰탕집을 개업해 운영해온 B씨는 평소처럼 식당에서 손님에게 내놓을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 남광주시장에 들렀다가 시내버스에 올랐다. B씨는 이날 생일을 맞은 큰 아들을 위해 미역국을 끓여 아침상을 차린 뒤 점심영업을 마치고 시장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반찬거리가 두툼히 담긴 바구니를 챙겨 든 B씨는 불과 두 정류장만 더 가면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지만 속절없이 무너진 건물더미에 묻혔다가 주검으로 발견됐다.

B씨의 아들 등은 붕괴참사 뉴스를 접하고 “혹시나” 하는 다급한 마음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차례 반복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자 불안감이 엄습했고 가족들과 논의한 끝에 인근 파출소를 찾아 “어머니와 연락이 두절됐다. 붕괴사고 현장에 있는 것 같다”며 난생처럼 위치추적을 의뢰했다.

경찰의 휴대전화 위치추적 결과 B씨의 최종 위치는 철거건물 붕괴참사 현장과 일치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실낱 같은 희망을 가졌지만 잠시뿐이었다. 허망하게도 B씨는 1시간여 만에 시멘트와 흙 가루가 가득한 시내버스에서 가족들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신세로 119구조대원들에 의해 가족과 재회했다.

이날 오전 참사현장 인근 모 장례식장 빈소에서 마주친 B씨 유족들은 친척과 이웃의 애경사까지 후덕하게 챙기던 B씨의 난데 없는 비보에 눈시울을 붉히면서도 경찰의 철저한 조사와 사고재발을 막기 위한 엄중한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유족 C씨는 “아비규환의 대형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아무 죄없는 억울한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며 “소 잃고 외양간 고치겠다고 입버릇처럼 외치기만 할 게 아니라 사고 책임자들을 가려내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생일에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잃은 큰 아들은 “미역국을 꼭 챙겨 먹으라”고 전화를 하신 게 유언이 됐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작은 아들은 지난 주말 어머니와 큰 형이 사는 집에 갔다가 “밥을 먹고 가라”는 권유를 뿌리친 게 통한의 기억으로 남게 됐다며 허탈해했다. 그는 “어머니가 시내버스에 탔다가 변고를 당하신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설마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 꿈에도 몰랐다”고 애통한 표정이었다.

붕괴참사 17명의 사상자들은 모두 시내버스 승객들로 확인됐다. 종잇장처럼 찌그러진 시내버스에서 숨진 채 발견된 이들은 대부분 뒷좌석에 앉아 있다가 건물 잔해에 매몰됐다.

팔과 다리를 크게 다친 운전기사와 나머지 승객 7명 등 중상자 8명은 비교적 덜 부숴진 시내버스 앞 좌석 쪽에 있다가 1~2시간여 만에 우여곡절 끝에 구조됐다.

생존자들은 시내버스 전면부 차창을 깨뜨려 탈출 공간을 확보한 119대원들에 의해 참사 현장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난 9일 오후 4시22분쯤 광주 학동 재개발지역에서 철거 공사 중이던 5층 건물이 무너져 바로 앞 도로에서 정차 중이던 시내버스를 덮쳤다. 이 사고로 9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