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극소수의 자본가를 제외하고 노동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노동은 특별히 신성하지도 천하지도 않으며 살아가기 위해 누구나 하는 일이다. 따라서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노동자를 차별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노동에 대한 편견이 뿌리 깊은 한국에선 노동을 육체노동과 동일시 하며 낮게 보는 경우가 많다. 현행법에서 가치 중립적인 ‘노동’이란 용어 대신 열심히 일한다는 뜻으로 사용자 관점의 ‘근로’가 사용되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연극계에서도 노동을 소재로 한 노동연극은 오랫동안 특수한 분야로 치부됐다. 1970년대 대학 문화패 출신이 노동자와 함께 만들며 등장한 노동연극은 2000년대까지만 해도 주류 연극계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당대 노동 현실을 직접 그린 노동연극은 공장, 즉 노동의 대표적 현장에서 상연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연극적 완성도는 논외로 치부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극장 안에서 노동을 조명하는 사례들이 부쩍 늘었으며 연말에 작품상까지 타기에 이르렀다.
노동과 노동자를 조명하는 연극계
올 상반기엔 유난히 노동연극이 극장가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의 삶을 다룬 음악극 ‘태일’이 2~5월 무대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3월에는 소설가를 꿈꿨던 전태일을 다룬 연극 ‘어쩔 수 없는 막, 다른 길에서’가 공연됐다. 이어 지난달 28일 개막한 뮤지컬 ‘1976 할란카운티’를 비롯해 6월에만 극단 고래의 ‘굴뚝을 기다리며’, 극단 파수꾼의 ‘7분’, 국립극단의 ‘SWEAT(스웨트): 땀, 힘겨운 노동’이 차례대로 관객과 만난다.
7월 4일까지 충무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1976 할란카운티’는 미국 남부 켄터키주 할란카운티 탄광촌을 배경으로 광산노조 광부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광산회사와 싸우는 이야기를 담았다. 할란카운티 탄광촌은 미국 노동운동의 이정표를 세운 곳으로 유명하다. 뮤지컬은 1976년 오스카상을 받은 다큐멘터리 ‘할란카운티 USA’를 모티브로 제작됐다.
10~27일 대학로 연우소극장 무대에 오르는 ‘굴뚝을 기다리며’는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모티브를 차용해 굴뚝 위 노동자들 이야기로 다시 썼다. 극작과 연출을 맡은 이해성은 2018년 블랙리스트 사태 당시 광화문 광장 텐트에서 고공농성 해고노동자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듣게 되면서 이번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 특히 파인텍 해고노동자들의 인터뷰와 이들의 일기가 큰 역할을 했다. 이어 연출가 이은준이 이끄는 파수꾼은 16~27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에서 해고 위기의 노동자들을 다룬 ‘7분’을 무대에 올린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극작가 스테파노 미시니가 쓴 것으로 2014년 초연됐으며 2016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8일 명동극장 무대에 오르는 국립극단의 ‘SWEAT(스웨트): 땀, 힘겨운 노동’도 기대작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철강산업 도시 레딩을 배경으로 노동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자들의 분투와 분열 및 노사 대립 등을 통해 노동의 의미를 묻는다. 극작가 린 노티지의 2017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인간 존엄을 벼랑 끝에 내모는 노동 현실을 이야기한다.
7월에도 노동연극 열풍은 이어질 예정이다. 극단 현은 7~18일 대학로 씨어터 쿰에서 연극 ‘트리거’를 선보인다. 2010년 충남 당진의 한 철강업체에서 젊은 노동자가 용광로에 빠져 숨진 사건을 소재로 댓글 시인 제페토가 쓴 시 ‘그 쇳물 쓰지 마라’를 모티브로 제작했다.
‘아름다운 동행’과 ‘노란 봉투 캠페인’이 남긴 것
노동연극은 주로 민족극(마당극) 운동 계열의 극단들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형식이 단순하면서 정치성은 강하다 보니 노동연극은 주류 연극계에선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형식과 내용이 다양해진 노동연극이 나오게 됐다. 1994년 극단 현장이 대학로 문예회관(지금의 아르코극장)에서 대표 레퍼토리 ‘노동의 새벽’을 올린 것은 노동연극의 형식이 대중적으로도 인정받게 된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2000년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함께 노동운동이 위축되면서 노동연극도 위축됐다. 특히 노동현장의 순회공연이 줄면서 소극장에서 공연되기 시작했다. 이어 민족극 계열에 속하지 않으면서 노동현장과 연극을 잇는 새로운 세대의 극단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대학로의 스타 극작가 겸 연출가가 된 오세혁을 배출한 극단 걸판이다. 노동자가 많은 경기 안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극단 걸판은 ‘그와 그녀의 옷장’ 등 노동연극으로 시작했지만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품을 통해 주류 연극계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게 됐다.
걸판 같은 사례도 있지만 대학로의 연극인들이 노동 문제에 직접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13년 2월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를 위한 단막극 페스티벌 ‘아름다운 동행’이 출발점이 됐다. (지금은 국내 연극계의 중추가 된) 김수희 김은성 부새롬 오세혁 윤한솔 이양구 등 당시 젊은 연극인 50여명이 참여해 재능교육 사태를 공부하고 해고노동자들과 교류하며 만든 작품들을 선보였다.
노동 문제에 눈을 뜬 젊은 연극인들은 이듬해 ‘노란 봉투 캠페인’에도 참여했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파업 이후 손해배상 가압류 징계를 받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캠페인을 벌이던 시민모임 ‘손잡고’가 연출가 동인 집단 혜화동1번지에 연극 제작을 제안한 것이다. 당시 만들어진 작품이 이양구 극작, 전인철 연출의 ‘노란 봉투’로 2015년 올해의 연극 3편에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혜화동1번지 동인들은 이후 노동 소재 연극 창작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직접 노동현장을 다니며 ‘노란 봉투’를 썼던 극작가 겸 연출가 이양구는 “‘아름다운 동행’과 ‘노란 봉투 캠페인’은 젊은 연극인들이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직접적 계기가 됐다”면서 “이후 일상에서 노동의 문제에 대한 자각은 점차 비정규직·청소년·여성·이주민 노동 등으로 세분되어 갔다”고 설명했다. 이어 “2014년 세월호 참사만 하더라도 노동 문제와 떨어져 있지 않다. 바로 안산과 반월 공단에 일하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아이가 죽은 사건이다”고 지적했다.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 예술가와 노동자의 연대 강화
노동연극이 근래 주류 연극계에서 큰 흐름을 이루게 된 데는 ‘아름다운 동행’이나 ‘노란 봉투 캠페인’의 계기 외에 한국 사회의 심화된 노동 현실 속에서 연극인들이 노동자라는 자각에 도달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연극평론가 김소연은 “노동연극은 그동안 노동 현장 중심의 연극이었다. 제도권 연극계에서는 소재적으로도 노동을 잘 다루지 않았지만, 2010년대 정치극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노동 소재의 작품이 많이 등장하게 됐다”면서 “한국 사회에서 동시대적인 이야기를 할 때 노동 문제를 비껴가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2017년 블랙리스트 사태 당시 연극인들이 광화문 광장에 세웠던 ‘광장극장-블랙텐트’는 연극인들과 노동자들의 연대를 크게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극단 고래의 대표로 블랙텐트 극장장이었던 이해성은 “젊은 연극인들이 검열에 항의하기 위해 블랙텐트를 세웠을 때 파인텍과 유성기업 등의 많은 해고 노동자들이 참여했다”면서 “블랙리스트 사태로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강하게 가지게 된 연극인들에게 노동자들과의 스킨십은 노동 문제가 우리와 밀접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도록 했다. 연극인 등 예술가들 역시 비정규직 노동자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어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 연극인들은 우리 사회의 문제와 예술의 공공성에 대한 고민이 커지면서 이를 연극에 접목하려는 노력을 더 많이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 연간 10편 안팎의 노동연극이 무대에 올라갈 정도다. 특히 2019년엔 소극장 연우무대의 ‘연우무대 프로파간다’와 국립극단 ‘연출의 판-작업준비 중’은 노동 문제에 포커스를 맞춘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에 같은 해
전태일 재단이 개관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기념관’은 노동 문제를 다룬 작품을 초청하거나 제작하면서 노동연극이 더욱 활성화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유현아 전태일 기념관 문화사업팀장은 “청년과 노동에 포커스를 맞춰 젊은 창작 단체의 목소리로 노동을 이야기하는 작품을 지원하고 있다”면서 “최근엔 MZ 세대와 맞물려 노동의 현실을 고민하는 작품도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