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중 가장 규모가 큰 소송에 대해 법원이 각하 판결을 내렸다. 피해자의 청구권은 있지만 소송을 통한 권리 행사는 제한된다는 게 재판부의 결론이었다.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과 엇갈린 판단이 나오면서 유사소송 20여건의 결과도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부장판사 김양호)는 7일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했다. 각하는 소송 요건이 갖춰지지 않았을 때 내려진다. 재판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해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되거나 포기됐다고 할 수 없지만, 소송으로 이를 행사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소송 비용은 원고가 모두 부담하라”고 밝혔다.
이번 판결은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의견과 궤를 같이 한다. 당시 대법관 13명 중 11명은 피해자 개인의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했지만,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은 반대 의견을 냈다. 청구권협정에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에 따라 개인의 소송을 통한 권리행사도 제한된다는 취지였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청구권으로 봄이 상당하다”며 “협정상 청구권의 대상에는 피징용 청구권도 포함된다”고 봤다. 그러면서 1965년 협정 전 한국 정부가 일본에 제시한 대일청구요강에 피징용 한국인의 기타 청구권이 포함됐던 점을 들었다. 2009년 외교통상부가 ‘청구권협정으로 일본이 한국에 지급한 무상 3억 달러에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청구권이 포함돼 있다’고 공식견해를 밝힌 것도 판단 근거로 쓰였다.
청구권협정에 따라 피해자들의 재판청구권이 제한되지만, 이는 다른 헌법적 가치를 위한 것으로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재판부는 설명했다. 재판부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국제법 존중주의 등 다른 헌법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것으로 원고들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했다. 청구권협정 후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해온 점도 고려됐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소송을 제기하고 6년 만에 받아든 ‘각하’ 판결에 반발했다. 선고기일이 갑자기 앞당겨져 지방에 사는 일부 원고는 이날 법원에 오지도 못했다. 원고 대리인 강길 변호사는 재판이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이번 판결은 앞선 대법원 판결과 정반대되는 내용”이라며 “항소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강제징용 관련 재판 중 가장 규모가 큰 이번 소송 결과가 대법원 판결과 엇갈리면서 유사소송의 향방도 알 수 없게 됐다.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강제징용 피해자 4명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이후 추가 소송이 연달아 제기됐다. 현재 진행 중인 강제징용 관련소송은 확인된 것만 20여건에 이른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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