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 지배와 징용의 불법성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국내법적인 해석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부장판사 김양호)는 7일 오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85명의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이날 판결은 ‘신일본제철은 여운택 할아버지 등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는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결론을 뒤집은 것이다. 국제사회를 고려하지 않은 국내법적 시각만으로 1965년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하면 안 된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재판부는 “당시 대법원의 소수의견과 동일하다”고 했다.
6년여 만의 1심 선고가 1분 남짓 만에 끝나자 원고들은 사법부를 성토하며 항소할 뜻을 내비쳤다. 판결 직후 사법부 내부도 크게 술렁였다. 대법원 다수의견에 명백한 반대를 표하는 1심 판결은 극히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오전까지만 해도 법관들 사이에선 대법 판례대로 원고 승소 판결을 예상하는 분위기였다.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다른 판단이 없겠지만, 국제법을 함께 고려한 판결이 불가피하다”는 평가도 나왔다. 서울의 한 부장판사는 “대법원 선고 2년여 만에 이런 ‘들이받는’ 판결이 나왔다는 점은 시사적”이라고 말했다.
“청구 인용은 국제법 위반”
재판부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위자료 청구권 존재 여부를 판단하기보다는 한국 법원에서의 소송을 통해 청구권을 행사하는 것이 합당한지를 더욱 고민했다. 이번 사건은 국내법과 함께 국제법을 따져야 하는 것이며, 결국 국제사회의 규율에 맞는 해석과 처리가 불가피했다고 재판부는 설명했다. 그 결과는 결국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송으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판단이었다.
재판부는 이번 청구를 받아들일 경우 비엔나협약 27조, ‘금반언의 원칙’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우려했다. 2018년 대법원의 위자료 청구권 인정 판례에도 불구하고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이 조약으로서 유효하다는 의미다. 비엔나협약 27조는 “어느 당사국도 조약의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의 방법으로 그 국내법 규정을 원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금반언의 원칙은 “국가의 책임있는 기관이 특정의 발언이나 행위를 한 경우 나중에 그와 모순, 배치되는 발언이나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신의칙이다.
대한민국의 사법 신뢰 손상, 문명국으로서의 위신 추락, 일본 및 미국과의 관계 훼손 등 국제적인 역효과도 판단에 고려됐다. 한국 법원이 일본의 손해배상 책임을 확정한다면, 독도 영유권과 일본군 위안부 등 다양한 주제를 두고 일본으로부터 국제사법재판소(ICJ) 회부 압박을 받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우려였다. 국제재판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패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재판부는 봤다. 애초부터 한국으로서는 모든 사안에서 승소해도 얻을 것이 없고, 국제관계의 경색으로 손해만 입게 된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대법 판결 2년여 만에…”
원고들은 각하 선고에 분노했다. 필요 이상으로 외교적 관계를 고려한 판결이라는 비난도 나왔다. 장덕환 대일민간청구권 소송단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고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울어야 하는지 정말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라고 했다. 소송 대리인 강길 변호사는 즉각 항소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최소한 임금과 위자료는 배상해야 하며, 양국 관계도 그런 기초 위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법관들은 현실적으로는 이 판결이 상급심에서 파기될 것이라 예상하면서도 ‘국제법적 현실’ 언급에 의미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서울의 한 부장판사는 “재판부가 ‘헌법과 국가 그리고 국민을 수호하기 위해 이렇게 판결할 수밖에 없었다’고 언급한 데 깊은 고민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재판부가 따른 2018년 10월 대법원의 소수의견이 타당해 보인다”며 “법리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런 판결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외교부는 “합리적 해결을 위해 일본과 열린 입장으로 협의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외교부는 “앞으로도 사법판결과 피해자 권리를 존중하고 한·일관계 등을 고려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양국 정부와 모든 당사자가 수용 가능한 합리적 해결방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박성영 손재호 기자 ps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