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선교 열전] ‘우간다의 나이팅게일’ 김정윤 선교사의 삶과 신앙<6-끝>

입력 2021-06-07 00:04

제가 사역하였던 시절, 우간다 병원의 간호사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일하면서 배운 간호 보조사들이었습니다. 폭증하는 의료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체계적인 간호교육을 해 하루빨리 간호사로서의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었고 신규 간호사 육성도 절실했습니다. 아루아에 정부가 세운 간호학교가 있지만 우리가 자체적으로 간호학교를 세우려고 한 이유입니다.

쿨루바 간호학교는 많은 어려움과 난관 속에서 드디어 1993년 2월 정규 간호학교로 승격됐습니다. 나는 학교 인가 과정에서 아무리 우리가 서둘러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지 않으면 일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어렵사리 정규 간호학교로 승격이 되면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모든 역경을 딛고 교과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졸업한 졸업생이 결혼식을 겸해 졸업식을 했던 일, 승격 직전 해에 32명의 모든 학생이 예수님을 영접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학생들에게 간호 교육과 함께 지역 전도를 나가는 등 평신도 지도자 양성과정을 이수토록 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간호를 하게끔 교육하고자 했던 일이 무엇보다 기억에 남습니다.

또한 쿨루바 병원은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한국, 독일, 호주, 뉴질랜드, 우간다 등 7개국 출신 선교사들과 현지인들이 협동해서 사역하는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들은 소명의식이 대단해 여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병원이 그럭저럭 운영되는데 그런 점이 ‘불쏘시개’로 작용하곤 합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가오리다’라는 분명한 소명의식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가끔은 의욕이 넘쳐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성격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에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없을 순 없지만 무엇보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경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왜 저렇게 해야 하나”하고 의문이 들 정도로 과격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눈에 띄기도 합니다.

비단 남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남에게 그런 인상을 심어 주지 않았나 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이 잦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안에서 이뤄진 공동체의 삶이니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자’는 사랑과 용서의 미덕을 발휘하고자 노력했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문구를 책상머리에 적어 놓고 매일 읽으며 낮은 자세로 사람들을 섬기고자 힘을 냈습니다.

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도로 화합을 이루기 위해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성경공부운동을 펼쳐나갔습니다. 근무시간 전인 아침에 둘씩 짝을 이뤄 기도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 주님께서 우리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던 쿨루바 병원에 먹구름을 걷어내고 주님의 빛으로 환하게 밝히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간다에서 오지를 다니느라 비포장도로를 많이 차로 다녀 척추가 내려앉아 척추 수술을 그동안 여러 번 하였습니다. 우간다에서 뼈를 묻고 싶었지만 지금의 저의 상태가 오히려 선교지에 부담이 될 것 같아 동생들이 있는 한국에 왔습니다. 현재는 요양병원에서 휠체어에 의존하여 지냅니다. 연동교회에서 척추수술비를 부담해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님들의 기도로 수술 후에 허리 통증이 없고 회복 중에 있습니다.

이제는 선교지에서 은퇴하고 천국 갈 때까지 중보기도 사명자로 살려고 합니다. 선교지에서 경험한 것들을 후배들에게 나눌 기회가 생겼으면 합니다.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하셨던 선교사님들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한 산골 마을에 모여 살고 계시어 다음세대에게 ‘선교와 복음의 살아있는 역사’로 있듯이 한국에도 이러한 장소가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젊은이들이 찾아오기에 좋은 위치에, 소통하기 좋은 지역에. 끝으로 어디에서나, 어느 때나 구령사업에 전념하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다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