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분의 아이들 세상] 두통이 심한 중학생

입력 2021-06-03 19:29

마음 속 갈등이나 어려움을 직접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이를 신체적인 증상 즉, 두통이나 복통, 가슴 답답함, 근육의 통증 등으로 표현한다. ‘신체화 장애’ 라고 한다.

P(가명)는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잠도 잘 수 없다고 했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원인을 찾는데 실패하고, 정신과에 내원했다. P는 원래 성실하고 얌전해 말썽 한번 부리지 않았던 아이였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몹시 순종적인 아이였다. 하지만 두통이 생기고부터는 모든 게 달라졌다. 모든 걸 포기한 듯 우울하고 무기력했으며, 공부도 안 하고, 심지어 학교도 안 가려했다. 부모님에게도 짜증을 많이 내고 반항하며 때로는 공격적이다. ‘강압적이고 엄격한 아빠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면서. ‘두통이 해결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특히 ‘신체화 장애’가 많은 건 감정을 자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 때문이다.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표현해야 하는데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나쁜 것’으로 간주하는 가정이 많다. ‘그런 말 하면 못써’라고 하면서 감정을 억압하거나 아이의 분노나 억울함을 위로하려고만 하면서 감정을 회피하도록 가르친다.

마음이 불편한 것은 빨리 털어버려야 한다. 부정적인 생각은 바꾸어서 긍정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쉽던가? ‘생각을 바꾸거나, 어떤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처럼 비공감적으로 들리는 말도 없다. P의 부모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아빠는 단호하고 차가운 성격이다. 아이에 대한 기대가 많아 공부를 강요한 것도 사실이다. 아이가 부족해 보일 때는 ‘한심한 녀석’이라는 핀잔을 준 적도 많다. 그런 게 아이에게는 마음에 상처가 된 듯하다. 아빠는 미안한 마음에 아이에게 사과도 하고 태도도 바꾸어 보았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생각이나 나쁜 기억으로 한번 생성된 신경의 회로를 제거하기란 쉽지 않다. 그보다는 부정적인 생각과 기억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또 다른 생각이 만들어 질뿐이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더하고 또 더하고의 연속이다. 그래서 생각은 덧셈만 있을 뿐 뺄셈은 안 된다고 한다. 부정적인 생각 ‘난 한심한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안 하려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바꾸어 생각하는 것도 힘들다.

감각도 마찬가지이다. 머리가 조여오고, 숨이 답답하고 하는 감각도 조절할 수 있거나 제거 할 수는 없다. ‘무시하고 다른 생각을 해봐’라는 전략을 가르쳐 주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효과가 없다. 오히려 나는 ‘머리가 아파서 공부를 할 수 없어’, ‘나는 우울증이라서 할 수 있는 게 없어’라는 인과론에 매달려 있다는 거를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하다. ‘머리가 아픈 것’ ‘공부하기 어려움’도 엄연한 현실이지만 이것의 인과관계는 반드시 진실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인과론적’ 사고에 융합되어 자신을 사슬로 얽어매고 있는 거다.

‘억압적인 아버지로 인해서 나는 우울증이 생겼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일부 사실이지만 이도 역시 지나친 사고의 융합이다. 이런 융합에 사로 잡혀 있다면 자유로워질 수 없다. 물론 ‘우울증이라는 핑계를 대지 마’, ‘아버지 탓을 하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구나’하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융합된 사고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자유로워 질 수 있다. 벗어난다는 것은 생각이나 감각을 교정하려는 노력보다는 그것을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대신에 그래도 조절하는 게 좀 더 수월한 ‘행동’을 바꾸어 보자. 가치, 인생의 최종 목표에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생각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경험이 해주는 소리를 알아차려 보자. ‘두통을 해결해 보려는 지금까지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나? 그런 노력으로 지금 나는 행복해 졌나?’, ‘두통이 다 해결된다면 과연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질문해 보자.

물론 지금 당장을 두통만 벗어난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은 어차피 ‘고통의 바다’인 것을 무엇을 해결하고, 제거한다고 해서 새로운 복병이 나타나지 않을까? 침몰하는 배를 바라보면서 ‘배가 침몰한 원인을 찾는 연구를 해 원인을 해결하려고 할까?’ 아니면 ‘침몰하는 배를 들어 올릴 방법을 먼저 찾아볼 것인가?’

이호분(연세 리정신과 의원 원장.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우울한 아이 # 두통 #의욕이 없는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