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치와 수궁가 열풍,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덕분?

입력 2021-05-27 17:30 수정 2021-05-27 23:57
2018~2019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선보인 '드라곤 킹'은 이날치가 결성되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당시에서 '범 내려온다' 장면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토끼와 별주부 자라 이야기로 잘 알려진 ‘수궁가’는 판소리 다섯 바탕 가운데 유일하게 우화적인 작품이다.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등 다른 네 바탕에 비교해 비장미는 덜하지만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이 넘친다. 그동안 아동용으로 각색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 소리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이날치가 등장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이날치는 영화 ‘타짜’ ‘곡성’ ‘부산행’ 등의 음악 감독이자 밴드 어어부프로젝트, 씽씽에서 활약한 베이시스트 장영규를 주축으로 베이스 2명, 드럼 1명, 소리꾼 4명으로 이뤄진 밴드다(최근 베이시스트 1명이 탈퇴해 6명이 됐지만, 공연은 객원을 포함해 7명이 한다).

장영규(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끄는 이날치 밴드는 수궁가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 LG아트센터 제공

2019년 초 결성돼 홍대 클럽 등에서 공연하며 입소문을 타던 이날치는 그해 9월 네이버 문화재단의 유튜브 채널 온스테이지에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와 함께 선보인 ‘범 내려온다’ 영상으로 젊은 층의 관심을 끌었다. 이어 12월 발매된 싱글 앨범을 시작으로 6개월간 매달 곡을 발표한 뒤 지난해 5월 말 정규 1집 ‘수궁가’를 발매했다. 퓨전 국악이라도 판소리가 기본인 음반 가운데 이날치의 수궁가만큼 주목을 받은 것은 없었다.

지난해 8월 한국관광공사가 해외 홍보 영상(Feel the Rhythm of KOREA)은 수궁가 열풍을 폭발시켰다. 서울, 부산, 전북의 관광 명소를 배경으로 이날치의 가락에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안무가 더해진 영상은 신드롬을 일으켰다. 또 이날치의 수궁가는 다양한 광고에도 사용됐다.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인 김수연 명창. 국립극장 제공

이날치가 일으킨 수궁가 열풍은 공연계 전반으로도 확대됐다. 지난해 완창 판소리 무대 등 국악계에서 유난히 수궁가를 자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김수연 명창이 국가무형문화재(인간문화)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 인정 예고를 거쳐서 최종 결정된 것과도 관련이 있지만, 수궁가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늘었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김수연 명창은 박초월(1917~1983) 명창의 호를 딴 미산제 수궁가를 잇고 있다. 김수연 명창은 “최근 수궁가에 대한 사람들이 관심이 높아진 것이 반갑다”면서도 “‘범 내려온다’ 외에도 좋은 대목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좀더 깊이 있게 음미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특히 올해는 국립창극단이 수궁가 열풍에 한층 기름을 부은 모양새다. 국립창극단이 지난 4월 17~18일 선보인 ‘절창’과 6월 2~6일 무대에 올리는 ‘귀토’ 모두 수궁가가 원작이다. ‘절창’은 젊은 소리꾼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수궁가를 입체창(역할을 나누는 데서 나아가 장단에 맞춰 가사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선보인 것이다. 그리고 ‘귀토’는 국립창극단 최고 흥행작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고선웅-한승석 콤비가 다시 합세한 작품으로 수궁가 가운데 토끼가 육지에서 겪는 갖은 고난과 재앙인 삼재팔난에 주목해 새롭게 창극화했다.

국립창극단의 젊은 소리꾼 유태평양(왼쪽)과 김준수는 '절창'에서 수궁가를 입체창으로 선보였다.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은 근래 수궁가 열풍을 의식해 ‘절창’과 ‘귀토’를 기획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실제로 ‘귀토’의 경우 지난해 7월 2020-2021시즌 레퍼토리를 발표할 때부터 나와 있던 것으로 유수정 예술감독은 “코로나라는 어려운 시기에 관객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생각하다가 수궁가를 떠올리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완창 판소리 무대의 연장선에 있는 ‘절창’의 경우 당초 젊은 소리꾼들이 자신 있는 판소리 대목으로 자웅을 겨룬다는 콘셉트였다. 그런데, 팬덤을 거느린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출연하게 되면서 수궁가의 입체창을 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두 사람 모두 미산제 수궁가를 배웠다는 공통점이 큰 역할을 했다. 다른 바탕의 판소리는 두 소리꾼이 각각 다른 스승에게 배워 유파가 다른 만큼 입체창을 하기가 쉽지 않다.

올해 공연계의 수궁가 열풍은 6월 11~12일 LG아트센터에서 이날치x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수궁가’로 정점에 도달할 전망이다. 최근 이날치가 발표한 싱글 ‘여보나리’를 포함해 정규 1집 수궁가 전곡을 라이브로 공연한다. 이날치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함께 앨범 전곡을 공연하는 것은 지난해 6월 LG아트센터 공연 이후 1년 만이다. 특히 올해는 한국의 대표적 설치미술 작가 최정화가 무대미술을 담당해 기대를 모은다.

지난해 6월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이날치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LG아트센터는 올해 다시 공연을 올리면서 설치미술 작가 최정화에게 무대미술을 맡겼다. LG아트센터 제공

그런데, 한국에 수궁가 열풍을 일으킨 이날치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게 됐을까. 이날치를 이끄는 장영규는 앞서 인터뷰 등에서 2018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수궁가를 소재로 만든 음악극 ‘드라곤 킹’ 작업이 계기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드라곤 킹’의 연출가 양정웅으로부터 음악을 의뢰받은 장영규는 안무가 안은미의 ‘바리’에서 함께 작업했던 소리꾼 안이호를 찾았고 이후 소리꾼 권송희 이나래 신유진도 합세했다.

애니메이션과 판소리를 결합한 멀티미디어 음악극 ‘드라곤 킹’은 2018년과 2019년 두 차례 공연됐다. 광주에서 공연되다 보니 이 작품은 대중적으로는 그다지 알려지진 않았다. 다만 당시에도 전문가들로부터 음악적으로는 호평받았지만 애니메이션의 활용 등은 아쉽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8~2019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선보인 '드라곤 킹'은 수궁가를 멀티미디어 음악극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2019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를 기념해 제작됐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흥미롭게도 이 작품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2019년 광주에서 열린 세계수영선수권대회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당시 대회 개최를 기념해 국제무대에 선보일 수 있는 한국적인 콘텐츠를 기획하면서 판소리 수궁가가 낙점 된 것이다. 수영 대회인 만큼 물이 배경인 수궁가로 결정된 것은 농담 같은 진담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관계자는 “심청가에도 용궁이 등장하며 물이 극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모듈형 공간에 어울리고 키치스러움을 드러내기엔 수궁가가 걸맞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연출가 양정웅은 “기획 단계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관계자들과 여러 번 논의를 했는데, 미디어를 활용해 판타지를 그려내기에는 수궁가가 제격이라고 다들 생각했다”면서 “수궁가는 그동안 동화로 많이 소비됐지만 인간사에 대한 풍자를 담은 깊이 있는 작품이다. 이날치 열풍을 통해 수궁가가 재평가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