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너 자신으로 태어났다” 자녀 ‘젊은 리더’로 키운 그의 교육법

입력 2021-05-26 11:27 수정 2021-05-26 12:00
오영석 박사. 프랑스 국립응용과학원 교수와 카이스트 초빙교수를 지냈다. 최현규 기자

“저는 절대로 부모가 자식을 책임지려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아이들에게도 네 길은 네 손으로 열고, 네 눈물도 네 손으로 닦아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부모가 아이의 장래를 책임진다고 했다가 잘못되면 어떡해요. ‘얘야, 미안하다, 한번뿐인 네 인생을 내가 망치고 말았구나’ 할 건가요?”

모름지기 부모란 자녀를 위해 최대한 편한 길을 열어주려 애쓰고, 내 자식 눈에 눈물이 흐를세라 노심초사하며, 아이의 진학과 진로는 물론 결혼한 뒤 손주까지 돌보는 ‘무한 애프터서비스’로 평생 자녀를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던가.

여느 한국 부모들과는 사뭇 다른 자녀교육관을 피력한 이는 프랑스 국립응용과학원 교수와 카이스트 초빙교수를 지낸 오영석(73) 박사다. 그는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 프랑스에서 남매를 낳고 키웠는데, 아들 세드리크(한국이름 오영택·39)는 현재 프랑스의 디지털경제부 장관이고, 딸 델핀(오수련‧36)은 프랑스 하원의원을 거쳐 유엔 세대평등포럼의 사무총장으로 글로벌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오 박사에게 그의 가족 이야기와 두 자녀를 프랑스의 젊은 리더로 키운 가정교육 철학에 대해 들었다.

-자녀들의 활약이 대단합니다. 세드리크 장관은 프랑스의 IT와 스타트업을 총괄하고, 델핀 사무총장은 오는 6월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 세대평등포럼을 준비하고 있다고요.

“영택이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지금의 여당인 앙마르슈를 함께 창당했어요. 마크롱의 역점사업인 디지털화와 신산업 정책을 책임지고 있죠. 수련이가 주재하는 다음 달 행사에는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을 비롯한 각국 정상이 참석해 여성과 청년의 권리 증진을 주제로 머리를 맞대는 거고요.”

오 박사는 남매를 한국 이름으로 불렀다. 세드리크는 네살과 한살인 두 아들을 뒀는데, 오 박사는 손자들도 자신이 지어준 한국 이름 성식이와 준식이로 불렀다.

2018년 10월 15일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 일행을 위한 국빈 만찬에서 문 대통령 내외와 함께한 세드리크(맨 왼쪽)와 델핀(맨 오른쪽).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이들 남매를 문 대통령에게 소개하고, 직접 휴대폰으로 이 기념사진을 찍어줬다. 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교육 비결이랄까요,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셨나요.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어줬어요. 독서는 망루를 쌓는 것과 같아요. 망루가 높을수록 멀리 볼 수 있죠. 대화도 중요합니다. 온 가족이 매일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각자 하루 이야기를 했어요. 집에 TV를 놓지 않아서 저녁시간을 길게 쓸 수 있었는데, 보드게임을 하거나 나란히 앉아 책을 읽었어요.”

-어떤 책을 읽게 하셨나요?

“아이들이 고르는 거지, 읽게 하지 않았어요. 수요일 오후엔 온 가족이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보냈어요. 만화책도 빌리고 역사 사회 과학 소설 가리지 않고 읽었어요. 집에서는 르몽드 신문과 미국의 타임, 뉴스위크를 구독했어요. 내가 읽다가 두면 아이들이 이게 뭘까 들춰보다가 자연스럽게 영어에 관심을 갖게 됐죠.”

-이제는 TV를 없애도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보는데요.

“며느리가 한국에서는 몇 살부터 휴대전화를 갖느냐고 놀라더군요. 식당에서 보면 아주 어린 아이한테 휴대폰을 쥐어주던데, 그럼 부모는 편하지만 아이는 헛똑똑이가 돼요. 손자 성식이가 뽀로로와 타요를 굉장히 좋아하지만 식사 중간에 보여주지 않아요. 저희 집에서는 식탁 예절에 엄격해서 밥을 안 먹거나 밥 가지고 장난치면 밥그릇을 치웠어요. 손자들에게도 마찬가지고요.”

오 박사네 남매는 프랑스에서 ‘대학 위의 대학’으로 불리는 엘리트 양성기관인 그랑제콜 출신이다. 그렇다고 모든 걸 알아서 척척 해내는 모범생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항상 1, 2등을 다툰 델핀에 비해 세드리크는 장난을 좋아해 부모가 학교로 불려간 일도 있고, 집중하지 않는 편이어서 성적도 부침이 있었다고 한다. 오 박사가 손을 들고 있게 하거나 엉덩이를 때리기도 했는데, 세드리크는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엄격한 한국식 교육이 아니었으면 장관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참 신기해요. 가만히 보니까 영택이가 아이들한테 엄해요. 그래서 둘이 있을 때 조용히 ‘너무 엄하게 키우는 거 아니냐?’ 했지요. 나중에 며느리한테 들었는데 영택이가 그러더래요. ‘아빠가 나더러 아이들 엄하게 키운다고 그러는데, 아빠가 나한테 얼마나 엄했다고!’ 부모일 때는 잘 가르쳐야 한다는 의무감이 컸지만,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 사랑만 주면 되니까 달라지나 봐요, 허허허.”

오영석 박사가 자신이 고문으로 있는 서울 종로구 예성화랑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 설 때마다 나비넥타이와 머플러, 중절모, 행커치프로 멋을 낸다고 했다. 최현규 기자

-프랑스에도 인종에 대한 장벽이 있을 텐데, 자녀들이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나요.

“영택이가 초등학교 때 ‘신턱(Chintok)’이라고 놀림을 받았어요.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이에요. 그래서 ‘그애들은 프랑스 문화 하나밖에 모르지만 너는 프랑스와 한국 두 개의 문화를 갖고 있어’라고 얘기했더니 그다음부터 괜찮아졌어요. 신턱이라고 부르면 ‘네가 잘못 알고 있는데, 나는 한국인이야’라고 했다더라고요. 자라서는 큰 문제가 안 된 것 같아요. 프랑스를 톨레랑스, 관용의 나라라고 하잖아요. 인종문제에 대해서도 그렇죠.”

비법이라기엔 다소 특별할 것 없는 독서와 대화가 교육의 큰 원칙이었다면, 오 박사가 들려준 세세한 이야기 중에는 번득이는 것들이 많다. ‘위인전은 권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누구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 건널 필요는 없다. 일단 도전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 ‘키 큰 사람과 악수할 때는 손을 낮게 내밀어라. 그럼 그 사람은 네 손을 잡으려 몸을 낮출 것이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져라’. 세드리크에게 준 행동 십계명 중에는 ‘절대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되 싸움을 걸지 말아라’ ‘술은 마시되 자제를 잃지 말아라’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반드시 도움을 주어라’ 같은 내용이 있었다.

-부모가 아이의 앞날을 책임지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박사님이 생각하는 부모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요.

“물론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자질을 키워주는 건 부모의 책임이죠. 다만 많은 한국 부모들처럼 아이의 진로와 장래를 자신이 결정하려는 건 무책임하다는 거예요. 제가 엔지니어니까 저도 아이들이 이공계로 진학하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그건 내 희망일 뿐이지 아이들이 따라야 할 의무는 아니라고 했죠. 그래서 둘 다 본인 뜻대로 진학하고 진로를 정했는데, 결국 그 선택이 옳았던 것 같아요.”

-자녀들에게 쓴 편지 중에 ‘너는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너는 너 자신으로서 태어난 것이다’라는 대목이 인상 깊었어요.

“부모와 자식은 수평적인 객체예요. 내가 세상에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더 많은 경험을 쌓은 것뿐이죠. 강하게 얘기하면, 저는 자식을 반려견 키우듯이 하는 부모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부모 눈에 좋아 보이는 대로 시키고 부모가 생각하는 대로 아이를 만들려고 하죠. 반려견한테 뭘 하겠냐고 물어보지 않잖아요? 묻지도 않고 불편한 옷 입히고, 목줄 잡아당기면서 통제하죠. 반려견도 그러면 잘못 키우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선을 그으면 혹시 서운해하지는 않았나요.

“포옹하거나 이마에 키스하면서 항상 애정표현을 했어요. 말 한마디에도 무엇을 담았는지 느낄 수 있잖아요. 아이에게 말 한마디도 정성스럽게, 아이가 사랑을 느끼게끔 얘기하는 거죠. 아이들한테도 대화할 때는 상대방에게 100% 집중해야 진실하게 통한다고 가르쳤어요.”

델핀이 프랑스 하원의원이던 시절 대정부 질문을 마친 후 국회에서 함께한 세드리크(오른쪽)와 델핀. 오영석 박사 제공

-부모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보여주는 겁니다. 첫째는 아이가 자기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여러 길을 보여주는 거죠. 책을 많이 읽게 하고 경험을 많이 쌓게 하면 스스로 생각을 하게 되는데, 부모는 그 생각에 부연 설명을 해주는 겁니다. 둘째는 직접 모범을 보이는 겁니다. 부모는 본보기예요. ‘맹모삼천지교’를 모범사례라고 하지만 직접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세 번 이사할 필요가 없었을 거예요.”

-모범이 돼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잘 보여주려면 부모 자신이 공부해야 합니다. 아이가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관찰하고 분석하고, 아이가 원하는 진로가 어떤 전망이 있는지 파악해야 하거든요. 또 부모가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비행기 안전 수칙 중에 산소마스크를 착용해야 할 때는 옆 사람을 돕기 전에 자기부터 쓰라는 게 있어요. 어설프게 도우려다 자칫 둘 다 위험해진다는 거예요. 부모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이에게 행복을 알려줄 수가 없어요.”

-박사님은 부모님에게 어떤 가르침을 받으셨나요.

“저희 홀어머니가 담배 공장에서 일하시며 삼남매를 키우셨어요. 제가 중학교 때 친구들과 백화점에 갔다가 유리창을 깼어요. 친구들은 다 도망쳤는데 저만 제가 깼다고 말해서 어머니가 한달 월급 가까운 돈을 변상하셨죠. 그런데도 꾸중하지 않고 정직했으니 잘했다고 하셨어요. 그게 굉장히 큰 가르침이었어요. 아이들한테도 솔직하게 자신의 행동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전했어요.”

오 박사의 삶도 드라마틱하다. 고려대 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수류탄을 개발했다. 외국 수류탄을 분해해 연구하던 시절이었다. 프랑스에서 미사일 기술을 전수받을 팀원으로 선발돼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당시 프랑스어 강사가 훗날 그의 아내가 됐다. 그러나 외국인과의 교제 때문에 보안대에 불려가는 일을 겪고 나서 연구소를 나왔고,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딴 후 정착했다. 유럽한국과학기술자연합회 회장을 지내고 입양아들을 위한 한글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교육공로훈장을, 한국에서는 과학 기술 발전에 대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박사님의 교육관은 어떻게 정립됐나요?

“저에게는 한국식 교육법, 프랑스식 교육법이 따로 없었어요. 한국인으로는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죠. 아이들에게 말한 내 인생길은 내 손으로 연다는 건 제 신조이기도 해요. 국방과학연구소에 있을 때 미사일 부서로 옮기려고 했더니 박정희 대통령 동기쯤 됐던 실장님이 ‘네 앞날은 내가 책임질 테니 그 부서로 가지 말아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랬죠. ‘제 앞날은 남의 손에 안 맡깁니다.’”

오영석 박사는 자녀들이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잃지 않도록 2년마다 한국을 찾았다. 남매는 대학 시절 한국에서 공부했고, 세드리크는 연세대에 교환학생으로 온 대학 후배를 만나 전통혼례로 결혼식을 치렀다. 델핀은 중요한 행사에는 한복이나 한복을 응용한 옷을 입는다. 최현규 기자

-남매의 성공은 박사님 노력의 결실이기도 한데요.

“아이들이 그렇게 큰 거지, 내가 키운 게 아닙니다. 저는 잘 자랄 수 있게 보조하는 역할을 했어요. 많은 분이 아이를 하나도 아니고 둘 다 훌륭하게 키웠다고 축하한다고 그래요. 자식이 성공하면 떡도 돌리고 플래카드도 붙이지만 아이들의 성취는 본인이 축하받아야 하는 거죠.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성공했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해하니까 그게 좋은 거죠.”

-너무 쿨하신데요. 자녀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갖지 않았더라도요?

“그렇죠. 어떤 직업을 갖던 간에 본인이 만족하고 인류에 공헌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그 부분을 굉장히 강조했어요. 아이들도 그 얘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해요.”

오 박사의 교육 중에 가장 남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좋은 머리는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했다.

-여전히 한국에서 교육의 목표는 명문대학 진학인데요.

“교육의 목표는 관찰하고, 인지하고, 분석하고, 비평하고, 종합해서 행동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한국 교육에서는 이 과정이 이뤄지지 않아요. 우리는 수능 시험을 하루에 끝내지만 프랑스는 일주일 이상을 봐요. 전부 주관식이고 논술식이에요. 수련이는 논술시험만 4시간을 봤어요. ‘초원 위에 초가집이 있다’ 문제 한 줄을 놓고 인간의 고독에 대해 쓰든지 농경, 환경 문제를 얘기한다든지 A4용지 여덟 장을 기술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능이 끝나면 쓸모없는 지식을 배우죠. 국가적으로도 얼마나 손해예요?”

-2004년 한국으로 돌아오신 후 카이스트 입학사정관으로 활동하셨다고요.

“2~3년 했는데, 가장 즐거웠던 경력 중 하나예요. 수많은 우수한 학생들을 만나봤어요. 저는 성적은 보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추천했고, 암기 중심으로 이뤄진 성적은 큰 의미가 없다고도 생각했으니까요. 원래 면담은 30분인데 대개 두 시간씩 했어요.”

-어떤 질문을 하셨나요?

“여러 가지였는데, 예를 들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세 가지가 어떤 것이냐고 물어봐요. 대개 불의 발견, 산업혁명, 문자와 인터넷의 탄생 같은 걸 꼽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설명해달라고 하면 학생의 논리와 사고가 드러나죠.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본인에게 중요했던 일 세 가지를 말해달라고 하는데, 학생들이 이걸 제대로 대답을 못해요. 심지어 많은 학생이 울었어요. 자기를 뒤돌아본 적이 없었다면서, 가슴에 품고 있었지만 말해본 적 없는 얘기들이 나와요. 시험관인 저한테 속마음을 털어놓는 거니까, 참 외로웠던 거예요.”

-평가가 아니라 상담이 됐네요.
“물론 그 학생들을 다 붙여준 건 아니에요. 그런데 떨어졌던 학생 중에 지금까지 깊게 연락하는 학생들이 있어요.”

2018년 10월 한국에서 열린 오영석 박사 칠순 잔치 때 세드리크와 델핀 남매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오영석 박사 제공

-자녀들과는 얼마나 자주 만나세요?
“코로나19 전에는 내가 1년에 서너번 프랑스로 가고, 아이들이 한두번씩 한국에 왔고요.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 화상통화를 해요. 영택이는 지난달 서울에 왔다 갔어요.”

오 박사가 인터뷰 말미에 자랑하듯 보여준 왓츠앱 대화방에는 손자들 동영상이 가득했다. 큰 손자 성식이가 우리말과 불어를 섞어 “할아버지, 봉주르~”하고 한참을 재잘대듯 말하고 나면 세드리크가 대화를 이어받았다.

오 박사는 인터뷰 내내 한 번도 희생이나 헌신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세드리크가 오 박사의 칠순 잔치에서 낭독했다는 글에는 ‘아빠의 희생에 감사한다’며 ‘아빠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교육해야 할 새로운 세대가 있기 때문’이라고 써있었다.

-세드리크와 델핀은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있나요.

“수련이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유엔 사무총장이 꿈이라고 했어요. 굉장히 오랫동안 그 꿈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그 꿈을 버렸다고 할 수는 없죠. 여성문제,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 참정권을 위해 활동하기도 했어요. 쉽지는 않겠죠. 앞으로 경험을 더 쌓아야 되고요. 세드릭은 직접 기업을 키우고 싶어하는데, 정부에 남더라도 정치를 위한 정치보다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지 않을까 해요.”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