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 후 제기된 수십 건의 유사 소송이 ‘병목 현상’을 겪고 있다. 소송 서류가 공시송달될 때까지 일본 기업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경향이 강해진 탓이다. 법원에 사건이 쌓이고 있지만 배상에 이르는 길은 여전히 멀다. 2년 7개월 전 확정 판결이 난 사건조차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이 지급되지 않고 있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이번 주에만 서울중앙지법에서 강제징용 관련 손해배상 재판 6건이 열린다. 소송 대부분은 2018년 말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제철과 미쓰비시 중공업이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듬해인 2019년 제기됐다. 하지만 일본 기업의 비협조로 소장 접수 후 한참 뒤에야 소송절차에 들어간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김모씨 등 5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추가 소송의 경우 2019년 4월 소장이 접수되고 1년 6개월이 지나서야 일본제철의 소송대리인이 선임됐다.
6년 만에 첫 변론기일이 열리는 사건도 있다. 송모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가족 85명은 2015년 5월 옛 스미토모석탄광업 등 16개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 후 6년 동안 9번의 기일이 잡혔지만 재판이 열리지 못했다. 법원이 보낸 서류에 일본어 번역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수신을 거부했고, 원고 대리인이 교체되는 등 절차가 지연됐다. 하지만 법원이 지난 3월 공시송달에 나서면서 오는 28일에 변론기일이 잡혔다.
이처럼 강제징용 관련 소송은 일본기업의 비협조로 재판이 지연되면서 공시송달이 이뤄진 경우가 많다. 공시송달은 소송 상대방이 재판에 응하지 않을 경우 법원 게시판이나 관보에 올리면 서류가 전달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다. 2018년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를 대리했던 김정희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과 2019년 일본의 수출제한조치를 기점으로 일본 기업이 공시송달 때까지 무대응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며 “이전에도 송달이 지연되곤 했지만 지금처럼 아예 막히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앞서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 역시 배상 절차에서 비슷한 난관에 봉착한 것은 마찬가지다. 미쓰비시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기업이 손해배상에 나서지 않자 국내 자산에 대한 압류명령과 매각명령을 신청했지만 이 서류도 송달이 되지 않았다. 압류명령이 공시송달되고 효력이 발생하자마자 미쓰비시는 자산 매각을 피하기 위해 항고와 재항고를 이어가는 중이다. 이에 비해 비슷하게 자산 매각을 피해오던 일본제철의 경우엔 올해 초 법원에서 현금화를 위한 감정절차를 마쳤다.
김 변호사는 일본 기업의 태도와 관련해 법원의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주문했다. 그는 “일본 기업이 항고와 재항고를 이어가고 있지만 집행정지 효과가 없어 법원에서 절차를 밟아나갈 수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