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人 이야기] 소극장 ‘공유’ 이끄는 연출가 송형종

입력 2021-05-24 17:59
연출과 행정을 함께 하는 송형종은 예술가 사고로 행정을 바라보고, 행정의 사고로 현장 예술을 바라본다.

소극장 공유 2기 ‘동인 페스티벌’을 이끄는 연출가 송형종(57)은 연극 행정가로 익숙하다.
‘연극 생각을 잇다’라는 부제로 열리고 있는 동인 페스티벌은 김민정 작가 초연 작품 <짐승의 시간>(이성구 연출)을 출발로 8월 1일까지 열린다.

이번에 참여하는 8개 극단 대표들이 운영위원으로 공동으로 운영하고 관객과 대화는 이번 페스티발에서 특별한 프로그램이다. 작품 <헬메르>(극단 이화), <뜨겁게 안녕>(U2 Theater), (극단 청예), <밀정의 기록> (여명 1919), <190326, 3,26 뚝섬의 외침>(극단 물 맑고 깊은), <나, 그리고>(창작 집단 세종), <사육신>(극단 명장)이 릴레이로 올리고 있다. 첫 번째 연극 <짐승의 시간> 작품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80석 규모 작은 극장에 마스크를 쓰고 거리 두기 좌석제를 하면서도 관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송형종은 ‘항일여성독립기념사업회’ 대표이사를 하면서 2년 동안 대학로를 떠나 있었다.
그의 이름 앞에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다. 연출로도 인정을 받았다. 서울공연예술제 앙상블상, 2003년 올해 예술상 우수상, 제30회 영희연극상(2004)과 <오델로 니그레도> 작품으로 셰익스피어 어워즈에서 대상(2014)을 받으면서도 연극 행정가로 눈을 돌렸다. 제3대 서울연극협회 부회장을 거쳤고, 5대에는 서울연극협회를 이끌었다. 제6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면서 연극 행정 분야에 폭을 넓혔다. 항일여성독립기념사업회 대표이사는 작년 말 임기를 끝내고 내려놨다.

| 연출가 송형종 ‘남대문 시장 노점상으로 인생의 한 수 배우다’

<스페이스 공감> 연습실은 신설동역에서 10분 정도를 걷고, 골목으로 들어설 때 마스크를 쓴 그가 보였다. 전남 고흥에 나서 자란 송형종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질 무렵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진압군들이 쳐 놓은 바리케이트가 촘촘하게 쌓여가는 것을 보고 이때부터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들을 키웠다.

“5.18이 터지고 현장을 보고, 얘기를 듣고, 학교도 난리가 나니까요. 이때부터 연극을 통해서 세상에 항변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 것 같아요. 젊은 시절은 사회 불균형에 분노했고, 대학 때 나름 학생 운동도 하게 된 것이 영향이 컸어요.”

고흥 영주고등학교 2학년 때 천승세 작가의 ‘봇물이 터졌네’를 하면서 연출, 배우 1인 2역을 맡았다. 이때 경험들이 무대를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송형종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질 무렵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진압군들이 쳐 놓은 바리케이트가 촘촘하게 쌓여가는 것을 보고 이때부터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들을 키웠다.

“연기는 그게 마지막 작품입니다.(웃음) 그때는 발성이 뭔지, 연기가 뭔지 압니까. 옥상에서 소리만 질러대니 목이 붓고 덧나 아파서 울었던 적도 있어요. 맡은 배역에서 빠져나오는데도 한 달이 걸렸는데 현실 적응을 못 했어요. 연극이 너무 허망했어요. 85년도에 남대문 시장에서 ‘골라. 골라 삼천 원’ 손뼉 치고 떠들면서 노점 장사를 하면서 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연극영화과를 갔어요. 그때 차범석, 조병진, 이창구, 김방옥 교수님을 만나면서 연극 세계에 제대로 빠져든 겁니다.”

그는 상경(上京)해 재수하면서 남대문 시장에서 ‘골라 골라~’외치며 노점 옷 장사 인생 경력을 연극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털어 놓는다.

“골라 골라 하면서 악착같이 버티고 살아가려고 했어요. 남대문에서 노점상을 하면서 순수한 분들을 만나게 됐고요. 많이 배웠습니다. 제자들한테 ‘남대문 시장’ 얘기를 꼭 해요. 그 삶 속에 진짜가 있다고요. 가서 그분들 삶을 바라보는 것도 진실 된 연기를 마음으로, 몸으로 체득할 수 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고요.”

좌판을 펴고 남대문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던 시절로 ‘전투력’이 생겼고 그때 경험으로 승부사적 기질을 배웠다. 재수할 무렵, 서울로 상경한 송형종의 전투력은 ‘남대문 노점상 때부터 몸에 익었다’고 말한다.

대학(청주대 연극영화과)에 붙고 난 뒤에도 그의 기질은 연극만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학생회장과 특정세력들인 친구들과도 어울렸고 졸업 뒤에는 ITI한국본부 사무국장 및 이사, 한국연극협회에서 이사를 4번이나 역임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행정에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젊어서 한창 달릴 때는 정의도 외쳐보고 진영 논리로 판단도 많이 했어요. 다른 사람과 공존해야 하는 게 세상에 이치라는 것을 깨닫고는 크고 넓게 보려고 합니다. 내가 아프면, 상대방도 아픈 겁니다. 행정도 균형이고요. 연극도 더 열린 연극을 해야 하고요. 연극계 블랙리스트, 미투 등을 거치면서 연극 문화가 더 성숙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문화가 되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해요.”

송형종은 좌판을 펴고 남대문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던 시절 ‘전투력’이 생겼고 그때 경험으로 승부사적 기질을 배웠다.

그는 달변(達辯)이다. 말 한마디를 던지면 폭을 넓혀서 대답이 날아왔다. 그때마다 질문을 다시 던졌다. 대학로 관객 감소로 지원 사업을 받지 못하면 연극을 할 수 없고, 극장 월세는 감당이 안 되는 현실에서 극장 인수를 택했다.

“소극장 공유는 작년까지 나무 협동조합에서 운영했는데 해체가 됐어요. 폐관 위기였죠. 뜻 있는 분들이 함께해 주셔서 소극장 공유를 운영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작은 극장인데, 연극인들한테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후배 연극인들이 극장에서 다양한 연극 실험도 하고 우수 작품들이 개발될 수 있도록 지속해서 공연, 훈련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함께할 8개 팀을 1월에 선정을 끝내고, 제2기 소극장 공유 동인 페스티벌을 준비하게 됐습니다. 서울 5팀과 지역 3팀의 젊은 연출가들과 극단들이 참여하고 있어요.”

| 소극장 공유로 ‘생각을 잇고’,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로 역사의 소중함을 배워

송형종 연출은 소극장 공유 2기 동인 페스티벌 참가작 8개 작품을 선정하면서 부제를 ‘연극, 생각을 잇다’라고 정했다. 유독 젊은 연출가, 배우, 후배들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서로 공유하고 예술적 철학들과 경험을 이어가는 겁니다. 독일에서 공연을 봤는데 공연이 끝난 뒤 배우, 연출, 관객들이 40분 넘게 진행되는 토론 장면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어요. 연극 행위보다 더 중요한 시간이죠. 다른 생각들을 이어가고 공유하면서 예술적 사유들이 깊어진다는 것, 연극 감상보다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번 페스티벌에서도 관객과의 대화가 깊이 있게 진행되고 있고, 반응들도 좋습니다. ‘생각을 잇다’라는 것은 우주 사이클처럼 도는 겁니다. 철학과 연극은 사유를 위한 행위이고 바탕은 인문학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연극형식의 실험들이 부딪치고 이어가면서 다른 작품이 완성되고 성숙해 가는 겁니다.”

그를 만나기 전 대학로 혜화동 로터리에서 성북동 방향으로 가는 언덕 즈음에 있는 소극장 공유를 들렸다. <짐승의 시간>(이성구 연출)이 무대 연습 중이었고 극장 입구에는 포스터들이 촘촘하게 붙어 있었다. 연습 무대는 마치 인간과 짐승이 공존하고 살아가는 세계처럼 보였다. 그가 1998년도 3월에 창단한 극단은 ‘가변’(可変)이다. 극단 대표와 연출을 해오다가 이성구 연출이 극단을 이끌어 가고 있다. 물었다. “극단 이름을 왜 가변으로 했나?”

“당시에는 리얼리즘 연극이 싫었어요. 연극을 통해 시대를 반영할 수 있는 강렬한 연극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연극무대사 사실성에 머무르는 게 싫었고, 기존 연극과는 거리감을 두려고 했죠. 시대와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취지로 가변입니다. 열린 연극을 지향한다고 할까요. 시대가 다양하게 변화하는 것처럼, 시대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연극으로 담아내자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가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다고 들었을 때 정치적 활동으로 생각했었다. 물 한 잔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연극이라는 행위도 근본적으로 인간 얘기잖아요. 100년 전 독립 운동 역사가 빚진 마음으로 크게 다가왔습니다. 역사의식보다는 그분들의 삶과 열정을 기억하고 공감해 미래로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극도 삶과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서 배우와 연출, 연극 행위자들은 작품을 통해 깨우침을 얻는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우리 가슴속으로 살아있는 역사를 연극으로 만들고 전시회도 준비하면서 ‘항일여성독립운동가’분들을 적극적으로 알려 나가는 과정에 극적인 감동이 있었어요.”

서울연극협회 시절의 송형종.

그가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를 2년 동안 이끌면서 학술 중심에서 문화예술로 활동 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작년 말에는 미국으로 날아가 항일여성독립운동가 75분의 초상화전을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DC에서 개최하면서 교민들한테 한국 역사의 위대함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역사 주제를 가지고 랩 대회, 독백경연대회, 시나리오 공모전, 초상화 그리기 대회, 연극으로 주제공연 등 다양한 사업과 프로그램들을 기획하면서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코로나 정국에도 3.1혁명 101주년 및 광복 75주년을 맞아 제3회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추모문화제 성격으로 주제 공연 <여명 1919>를 주도했다. 2년 동안 3월1일부터 8월15일까지 바쁘게 움직이는 연극인이었다.

“연극이라는 행위가 근본적으로 삶과 인간을 얘기하는 겁니다. ‘여명 1919’를 공연하면서 우리 역사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시기가 되었어요. 후배들이 극단을 만들었는데, ‘여명 1919’입니다. 역사극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으로 방향을 잡았으면 좋겠어요. 3.1운동을 준비할 때 그분들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고 설레집니다. 100년 전 함성과 독립을 위한 절박함과 용기처럼, 극단도 용광로처럼 진실을 무대에서 내뿜을 수 있는 단체가 되었으면 하죠.”

| 농사꾼의 감각으로 연극 현장을 바라보고 싶다

연습실 입구는 ‘여명 1919’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30여 평 규모 연습실은 10여 명의 <밀정의 기록> 팀들이 연습 중이었다. 대본 읽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몸 풀기부터 연기 훈련, 연출 방향 등 허드렛일을 맡아서 자문한다며 웃었다. 연출, 기획, 행정력 등 그의 전투력은 틈을 보이질 않는다.

“아버지가 뛰어난 농사꾼이셨다. 진짜 농사꾼은 온도계가 필요가 없어요. 날씨 따라 직감으로 농사를 짓는 겁니다. 비료 뿌리고 농약 칠 때를 아는 겁니다. 농사지으면서 평생 쌓인 내공으로 농사를 하는 겁니다. 연극 행정가든, 연출가든, 결국에는 사람이 하는 거잖아요. 연극 행정은 창작자들을 위해 해야 하는 겁니다. 농사꾼 같은 마음으로 행정을 해야 하는데, 현장을 알지 못하고 행정을 한다는 것은 농사꾼이 아니죠. 이런 점에서 연출, 행정 두 가지 다 할 수 있다는 게 행운인 겁니다. 예술가 사고로 행정을 바라보고, 행정의 사고로 현장 예술을 바라본다고 할까요.”

송형종 연출가는 혜화동 1번지 3기 동인으로 연출가 김낙형, 박장렬, 오유경, 양정웅, 이해제 등과 활동을 해왔다.

송형종은 연출, 행정 두 가지 다 할 수 있다는 게 행운이라고 여긴다. 예술가 사고로 행정을 바라보고, 행정의 사고로 현장 예술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혜화동 1번지가 지금보다도 더 진보적인 연극을 하면 좋겠습니다. 실험적이고 강렬한 연극적 색깔들이 생산될 수 있는 연구소라고 할까요. 진지한 연극적 탐색, 생산적인 아이디어들이 보였으면 좋겠어요. 연극은 고통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용광로 같은 연극이 필요한 시대인데 혜화동 1번지가 그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죠.”

연극계 블랙리스트는 2014년 말 ‘제36회 서울연극제 대관탈락’ 사태부터 감지됐다. 당시 서울연극협회(회장 박장렬)는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문화예술위원회 산하 한국공연예술센터’ 상대로 고소장을 제출했고 블랙리스트 존재를 몰랐던 당시 서울연극제 집행위원회는 아르코에술극장 대극장 폐관 통보에 항의하며 마로니에 공원에서 대대적인 삭발식을 하고 저항했다.

2016년도에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들어 나면서 연극계와 문화, 예술계는 경악했다. 당시 박근혜 정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출발점은 박근형 연출의 연극 ‘개구리'로 알려졌다. 박근형 연출은 블랙리스트가 사회로 점화되기 앞서 2013년 박근혜 대통령과 박 대통령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 부녀를 풍자한 연극 ‘개구리'를 국립극단에서 선보였고, 이후 각종 정부의 연극 지원에서 탈락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블랙리스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어진 검열 사태는 최순실 사태로 번지면서 정국의 뇌관이 되었다. 이후 송형종 연출은 협회장으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연극계 블랙리스트 사태 현장에 있었다.

“국가 주도 문화 융성을 외치던 박근혜 정부 문화 정책 참사입니다. 당시 서울연극협회장으로 당선이 되니까 모 언론에서 청와대와 마찰이 예상된다고 했어요. 우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본 겁니다. 특정한 이념을 가지고 저항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사진을 구성할 때도 저와 의견이 다른 분들을 많이 배치하고 배려를 했어요. 마치 특정 정당을 지지하고 정치적인 이념으로 회원들하고 블랙리스트에 저항한 게 아닙니다. 시대에 비켜갈 수 없는 ‘외침’들이었어요. 연극계 블랙리스트 혼란기에도 연극 문화를 안정시키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잘한 것은 블랙리스트 근절을 위한 다양한 토론장을 만드는 일, 현장 소통을 강화하고 정부와 서울시를 상대로 새로운 협치 문화를 만들어내는 일, 또한 서울시 연극 균형 발전을 위해서 대학로는 연극인들을 위한 제작 환경 생태계를 촘촘히 확장한 겁니다. 25개 구는 청소년연극제 시민 연극제도 개최하면서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극도 발전을 시킨 것도 보람이죠.”

연극, 문화 정책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연극인들과 문화 정책에 관한 생각이 많아서인지 말은 빨라졌고, 몸을 움직이며 말을 했다.

남대문 시절의 송형종. 왼쪽에서 두 번째

“정부 지원금에 한계가 있습니다. 지원금에 의존한다고 해서 우수한 작품으로 결과물이 나온다는 보장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차이는 디테일에 있는 겁니다. 미래 예술가, 연극인들을 위한다면 다양한 예술적 실험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지원 사업도 디테일을 보강해 연극 환경의 생태계들이 더 다양해질 수 있도록 정책을 짜고 육성해야 미래 연극인들의 작품들이 그 시대를 변화하고 주도하면서 견인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극단들이 지원 사업에 의존하고 기획서 만들고 주어진 예산 범위에서 결승까지 간 단체들에게 N/1로 나누어 주는 시스템은 한계가 있습니다. 선택적 집중을 할 수 있는 지원 제도와 예술가들 육성하고 지원하는 시스템을 현실에 맞게 보강해야 합니다.”

김대중 정부 문화 정책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역대 정권을 돌아보면, 문화에 가장 투자를 많이 하고 변화를 주도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것 같습니다. 국가 예산 중 문화에 투자되는 예산이 높았어요. 피부로 느껴졌으니까요. 그 당시 한국 사회의 한류 문화가 신호탄을 울렸고 서태지 현상으로 대한민국의 문화의 패러다임이 바뀔 때잖아요. 문화는 시간이 필요한 농사입니다. 투자한다고 바로 성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 겁니다.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 문화체부 예산도 6조5000억에서 5000억이 삭감됐고, 현 정부 3년간 지속된 거죠. 그 이후에 예산도 물가 대비로 문화 예산이 증가됐다는 것을 못 느끼겠어요. 문화가 변화되고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현장과의 소통이 중요한데, 정부의 전문가가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공무원분들도 정책을 이해할 때 쯤 보직이 이동되고 하니까 문화 정책의 핵심을 파고들고 변화를 주도하는 전문가가 없는 것 같아요.”

| 문화정책은 ‘디테일’에서 결정된다

몸을 비틀면서 말을 이어 갔다.

“문화를 이끄는 분야도 특정 세력들이 장악했잖아요. 문화도 이념의 논리로 자리를 배치하고 낙하산 인사도 많아졌어요. 이념의 잣대로 문화를 바라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른 인재들이 등용되어야 하고, 정치적인 색깔과 이념은 달라도 문화는 또 같은 옷으로 가야 합니다. 줄 서게 만들고, 핵심라인들은 재단과 공공 단체로 이동하잖아요, 대한민국 문화 지분을 나눠 가지면 발전할 수 없는 겁니다. ‘저런 사람이 대한민국 문화를 이끌어야 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게 문제인 겁니다. 보수든, 진보든, 대한민국 문화가 발전되려면 인물 영입에 적극적으로 개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극 이야기를 꺼낼 때는 연극인 같았고, 역사로 주제가 바뀌면 역사 의식도 투철해 보였다. 연극행정과 정책, 문화를 꺼내 들면 거침없는 언변은 칼처럼 토해냈다.

“코로나 19 팬데믹 시대에 문화 정책 변화가 달라졌나?”

이 질문을 듣고는 그도 한 박자를 쉬고는 말을 했다. 쏟아낸 말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

“코로나 정국에 정부나 서울시가 문화예술가들을 위해 피부로 와 닿는 정책을 보이질 못하는 것 같아요. 문화예술가들을 소상공인들 정책으로 대하면 안 됩니다. 소상공인 지원 제도와 예술가를 위한 제도는 달라야 합니다. 지원금을 차별화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문화는 투자하고 기다려야 꽃 필 수 있습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문화유산들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잖아요? 견디고 버텨서 아름다운 자연 문화로 돌려받은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문화 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장 생태계가 파괴되고 예술가들이 생계 문제로 다른 길을 가야 하는 비극을 막아야 합니다. 단체장들의 위기 극복 의지와 정부 서울시와 협치가 절실할 때 입니다 ”

연기자 박정자 씨와 함께 선 송형종

그는 스마트폰을 보여주면서 “핸드폰에 ‘아시아의 중심–서울, 세계 공연 예술의 도시 서울’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써 놓고 다녔어요. 유럽 아비용처럼 한국 사회의 문화와 축제가 세계화로 가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인 계획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삼성의 핸드폰이 세계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에는 투자이고 반도체 시장의 변화를 내다보고 선점한 겁니다. 응용 예술이 발전할 수 있는 것도 순수 예술 분야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겁니다. 문화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예술가들을 위한 생태계 환경을 위해 디테일을 다르게 해서 정책을 마련하고, 투자도 해야 ‘세계 문화 도시 서울’이 될 수 있어요.”

연극문화가 대학로에 몰려 있다. 서울시 문화정책과 영향을 피부로 느끼는 지역이다. 성북구 ‘연극인 창작 연극 활성화 종합 지원 센터’는 22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연습실, 회의실, 연극 전용 소극장과 기획, 연습, 공연과 각종 편의 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서울시는 총 사업비로 348억 원을 투입했고, 연극인 임대 주택도 환영을 받았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세트, 소품들이 대부분 폐기 처분됩니다. 오세훈 서울시장 공약 중에 연극인과 공연예술인, 단체들을 위해 ‘공공형 예술인’ 창고를 지원해 주는 제도는 반드시 현실화 되어야 합니다.”

“결국에는 문화 발전도 사람이 하는 겁니다. 관객이 없으면 문화도 발전될 수 없는 겁니다. 미래 관객들 투자는 돈에 투자가 아니라 사람한테 투자예요. 서울시 문화예술관람 보조 사업으로 추진 중인 미 취학 아동·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연 예술 관람 예산도 폭넓게 지원되어야 하고요. 연극인 창작연극 활성화 종합 지원 센터도 예술가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해주면 또 다른 변화가 있을 겁니다. 서울시의 문화 정책을 파격적으로 해야 하고 열린 행정과 실험들이 필요해요.”

스마트폰이 울렸다. 여명 1919팀 호출이었다. 그와 마주 앉은 자리는 50센치 정도 간격으로 마주 앉았다. 말의 속도는 마스크가 터질 듯 보였고 노트북으로 옮겨지는 활자는 더뎠다. 원로 연극인들 얘기를 꺼냈다.

송형종은 대학에서 15년 동안 교수로 있었고 단체장과 문화예술위원, 혜화동 1번지 동인을 거쳐 많은 작품을 연출해왔고 문화 행정도 두루 거쳤다.

“‘노인 한 분이 없어지면 박물관이 없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꼰대꼰대 하는데, 원로들 경륜은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어요. 만약 평생 연극을 해 오신 선배가 계신다면 그 자체만으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비판은 예술가로써 가능할 수 있지만 연극을 위해 평생을 무대에 헌신하신 삶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대학에서 15년 동안 교수로 있었고 단체장과 문화예술위원, 혜화동 1번지 동인을 거쳐 많은 작품을 연출해왔고 문화 행정도 두루 거쳤다.

“사회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아왔다고 생각하죠. 이제는 현장에서 배운 것을 후배들한테 역량을 돌려주고 싶어요. 공유 소극장은 후배연극인들을 위한 극장으로 공유하고,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돕고 싶을 뿐입니다. 제가요. 농사꾼 아들로 태어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다섯째다.(웃음) 골라~ 골라 보따리 장사하면서도 많이 얻어 터졌어요. 삶 자체가 누구한테 지는 게 싫어서 달려온 인생인거죠. 많은 시간 약자로 살아왔고 최선을 다해 달려왔는데 앞으로 그만큼만 더 가고 싶네요.”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연극에 대한 생각을 말해 달라” 연습실에서 그의 달변은 침묵이 됐고, 시선과 표정은 그의 말을 표현하고 있었다.

“연극이 삶의 진실한 은유로서 작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궁극적으로 삶을 긍정으로 힘을 북돋워 줄 수 있는 것이 연극이며, 그것이 연극이라는 축제의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그를 만나기로 한 날, 배우 윤여정 선생이 영화 ‘미나리’로 오스카상을 손에 쥐자 세계는 한국의 노 여배우에게 시선이 몰렸다.

극단 후배들과 연습 하다가 걸어 나온 그는 “윤여정 선생님 수상으로 배우들과 국민에게 희망을 주신 것 같죠? 연기는 삶에 무게에서 나오는 것인데, 영화 미나리에서 그대로 녹아 나는 거죠. 배우가 연기로 관객을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겁니다. 삶 속에서 찐 연기를 발견하고 그게 배우의 몸과 감각으로 체득되신 것 같아요. 연기가 삶으로 녹아 있잖아요. 연기 매소드는 살아가면서 체득되는 것 같아요.”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