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업한 동네 목욕탕에서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변신했던 ‘행화탕’이 짧지만 굵은 삶을 마쳤다. 서울 애오개 고개 아래편 아현동에 있는 행화탕은 지난 2016년 5월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되살아나 꼬박 5년을 채운 뒤 영영 사라지게 됐다.
하지만 가는 길은 쓸쓸하지 않았다. 20일부터 치러진 행화탕의 삼일장에 운영주체인 문화예술콘텐츠랩 축제행성의 서상혁·주왕택 공동대표를 비롯해 수십 명의 예술 관계자들이 공동 상주로 나섰을 뿐만 아니라 1000명 안팎의 조문객들이 애도하러 다녀갔기 때문이다. 행화탕의 마지막 프로젝트이기도 했던 장례식은 한 편의 축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8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행화탕은 과거 아현동 주민들의 사랑을 받던 대중목욕탕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사우나, 찜질방, 고급 스파 등이 주변에 생겨나면서 손님이 점차 감소해 2008년 문을 닫았다. 재개발 예정지에 속한 행화탕은 이후 고물상 또는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거의 유휴공간으로 방치됐다. 2016년 초 복합문화공간을 찾으려고 재개발 지역을 돌아다니던 서상혁·주왕택 공동대표가 행화탕을 발견한 것이 출발점이 됐다.
두 사람은 당시 기획자 8명을 더 모아 최종 10명으로 기획단을 만들어 ‘행화탕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들은 우선 옛 목조구조물과 굴뚝, 보일러실 등 행화탕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남겼다. 벽면 내부의 칠을 벗겨내고 일부를 유리로 교체했지만 욕탕과 탈의실 등의 구조를 살린 것이다. 그리고 ‘예술로 목욕합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문을 연 행화탕은 카페와 함께 공연·전시·영상·교육 등이 열리는 독특한 복합문화공간으로 각광받았다.
폐산업시설을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지역재생’이 한국에서도 붐을 이룬지 꽤 됐지만 행화탕은 어떤 곳보다 알찬 기획을 선보였다는 평가받았다. 특히 실험적인 예술 프로젝트들이 자주 펼쳐졌는데, 지난 2019년 1월에는 AR(증강현실) 장치를 활용하고 게임 형식을 결합한 이머시브 시어터 ‘행화탕 장례식날’이 선보이기도 했다.
국민일보와 만난 서상혁 행화탕 대표는 “행화탕이 재개발 예정지에 속해 있었던 만큼 처음부터 시한부였는데, 얼마전 ‘5월 24일까지 퇴거하라’는 공문을 받았다”면서 “행화탕의 문을 열 때 운영 기간으로 2년 생각했던 것을 고려하면 오히려 긴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행화탕을 시작할 때부터 언젠가 다가올 건물의 장례식은 한바탕 축제처럼 치르고 싶었는데, 이번에 그렇게 됐다”고 덧붙였다.
3일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열린 행화탕의 장례식은 시종일관 유쾌했다. 다양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조문객들이 행화탕의 곳곳을 둘러보거나 타일에 글을 남기는가 하면 카페에서 ‘행화 에이드’ ‘반신욕 라떼’ 등 시그니처 메뉴를 즐겼다. 부의금을 내면 수건과 머그컵 등을 답례품으로 받을 수 있었다. 부의금은 행화탕에 대한 영상 기록물 등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특히 이번 장례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문화예술계에서 잔뼈가 굵은 중견 기획자들 수십여명이 공동상주로 참여해 행화탕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모습이었다. 남주경 상상발전소 대표, 안영노 안녕소사이어티 대표, 이선철 감자꽃 스튜디오 대표, 김서령 서울문화재단 예술청 공동청장, 독립프로듀서 이희진 등이 이름을 올렸다.
지난 2019년 이머시브 시어터 ‘행화탕 장례식날’을 비롯해 행화탕에서 여러 작업을 했던 시각예술 작가 한석경은 이번에 장례위원으로 나섰다. 그는 “2019년 ‘행화탕 장례날’은 오늘의 장례날을 예상하며 만들었던 공연 형태의 장례식이었다. 작품을 올렸던 그때 이미 이별의 순간을 맞이했었다”면서 “우리는 행화탕과의 지금 헤어짐을 슬퍼하지 않는다. 언젠가 우리는 또다른 행화탕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글을 남겼다. 그리고 독립프로듀서 이희진은 타일에 “구석구석마다 동료들과의 추억이 녹아있는 나이 든 목욕탕, 이젠 정말 안녕”이라고 썼다.
비록 행화탕은 문을 닫았지만 예술가와 기획자에게 행화탕에서의 경험은 새로운 공간에서 또다시 이어져 꽃피울 것으로 기대된다. 지자체마다 폐산업시설을 문화재생사업을 통해 바꾸려는 것이 붐을 이루기 때문이다. 행화탕은 문을 닫은 이후에도 흥미로운 사례로 오랫동안 언급될 전망이다.
글·사진=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