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지 ‘룰러’ 박재혁은 2016년 데뷔했다. 그해 바로 ‘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결승 무대를 밟았다. 이듬해엔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2018년엔 국가대표 원거리 딜러가 됐다. 2019년엔 슬럼프를 겪었고, 1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올해는 소환사의 컵 탈환을 노린다. 다사다난했던 그의 지난 6년을 함께 되돌아봤다.
2016년 아무것도 몰랐던 데뷔 시즌
“2016년엔 아무것도 몰랐다. 팀원들이 하라는 대로 했다. 2018년까지 ‘코어장전’ (조)용인이 형과 함께하지 않았나. 그때까진 의견을 내기보다는 듣는 편이었다. 2019년 서포터가 신인인 ‘라이프’ (김)정민이로 바뀌고, 팀이 리빌딩 되면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쪽으로 바뀌었다.
유행어를 빌리자면 2018년까진 무지성으로 플레이했다. 2019년부터 지성을 갖췄다. 그해까지도 높은 지성을 갖춘 건 아니었다. 2019년보단 2020년에, 2020년보단 2021년에 더 똑똑한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됐다. 2017년엔 보이지 않았던 킬각이 지금은 보인다.”
2017년 롤드컵을 들어 올리다
“많은 분이 나와 삼성 갤럭시의 전성기를 2017년으로 봐주신다. 그런데 나는 내 실력이 2018년부터 한층 더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2017년도의 내 플레이를 다시 보면 ‘쟤 진짜 못 한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맞지 않아야 할 상대방의 스킬을 다 맞는다. 라인전도 못한다. 한타 때도 저렇게밖에 못하나 싶다. 그때 플레이가 더 낭만 있다고? 낭만은 있는데, 못한다. 하하.
2021년의 ‘룰러’라면 결승전 3세트 마지막 한타 때 앞점멸 궁극기를 참았을 거냐고? 음…. 아마 썼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나한테 ‘수은 장식띠’가 있었던 거 알고 계셨나. VOD를 다시 보면 내가 수은 장식띠를 안 쓰고 기절 상태에서 상대방의 스킬을 다 맞는다. 지금의 ‘룰러’라면 수은 장식띠로 기절 효과를 제거한 뒤 더 좋은 플레이를 했을 것이다.”
2018년 좋았던 출발, 아쉬웠던 결과
“아쉬움이 많이 남는 해다.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선정됐다. 지역 예선에선 정말 잘했다. 스스로 실력에 대한 자신이 있었다. 스크림 결과도 아주 좋았다. 기세등등하게 서머 시즌을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힘이 빠지더라. 결과적으로 플레이오프에서 조기 탈락했고, 아시안게임도 망쳤다. 롤드컵은 어찌어찌 나갔지만 금방 떨어졌다.
나는 아시안게임을 치르느라 서머 시즌 개막 전에 비 원거리 딜러 연습을 한 판도 못 했다. 대신 정통 원거리 딜러로 비원딜을 상대하는 구도를 많이 연습했다. 그런데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게임 후반으로 갈수록 정통 원거리 딜러가 더 좋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굳이 비원딜을 해야 했나 싶다. 물론 2019년에 등장했던 소나, 야스오는 정말 좋았다.”
2019년 가장 크게 좌절했던 해
“2019년은 프로게이머로 생활하면서 가장 크게 좌절했던 해다. 스프링 시즌은 강등권만 벗어나자는 각오로 플레이했다. 서머 시즌 후반기에는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솔로 랭크도, 스크림도, 대회도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모니터만 봐도 어지러웠다. 게임 화면이 잘 안 보였다. 한타를 하다 보면 내가 앞에서 죽어 있었다.
정규 시즌 마지막까지 플레이오프 진출 경쟁을 했다. 차라리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프로로서 해서는 안 될 생각까지 했다. 시즌 마지막 경기가 담원 게이밍전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고 나서 아쉬움과 함께 ‘드디어 끝났다. 이제 쉴 수 있겠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경기장을 나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팬분들, ‘룰러 파이팅’을 외쳐주시는 팬분들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팬분들께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가 쏟아졌다. 팬분들께 시즌 마지막 인사를 드린 뒤 선수 대기실에서 혼자 30분을 펑펑 울었다. 그때 이후로 마인드가 더 강인하게 바뀌었다.”
2020년 젠지의 프랜차이즈 스타
“팀과 3년 계약을 맺었다. 좋은 선수들과 한 팀을 이루게 됐다. 지금 생각해봐도 최종 성적이 정말 아쉽다. 연습에서의 기량은 정말 좋았는데 이상하게 실전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스프링 시즌 땐 내가 아주 부진하지 않았나. 서머 시즌은 무조건 우승할 수 있다고 봤는데 아쉽게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다. 그런 와중에 천재지변도 있었고…. ”
커리어 하이라 할 만했던 서머 시즌
“스프링 시즌 땐 심리적으로 힘든 요인들이 있었다. 서머 시즌 땐 그런 것들을 덜 신경 쓰면서 게임을 했다. 그럴 수 있도록 주영달 감독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덕분에 편하게 플레이했다. 누구와 붙어도 다 이길 것 같았고, 실제로 불리한 라인전 구도에서도 우위를 점하곤 했다.
아, 구도와 관련해 억울한 게 있다. ‘앰비션’ (강)찬용이 형이나 ‘큐베’ (이)성진이 형이 ‘재혁이는 어떤 구도든 자기가 이긴다고 말한다’고 말을 하고 다녀서 이상한 오해가 생긴 것 같다. 나는 라인전 구도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편이라고 자부한다. 불리한 구도가 형성됐을 때, 어떻게 플레이하면 내가 이길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아, 롤드컵…. 왜 하필 자가격리 해제를 하루 남겨놓고 중이염이 발병했는지…. 새벽에 갑자기 귀가 욱신욱신거리면서 아파져 왔다. 잠을 설쳤다. 귀에서는 계속 고름이 나왔고, 어지럼증 때문에 게임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8강 G2전은 그보다 경기력의 문제가 컸다. ‘연습도 잘 됐는데…. 왜 이렇게 크게 지는 거지?’ 싶었다. 그냥 상대한테 두들겨 맞았다.”
2021년 또 준우승으로 끝난 스프링 시즌
“나 스스로도 작년 서머 시즌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프리시즌 땐 신화급 아이템 등이 새로 나오지 않고, 메타가 그대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처음엔 이런 변화들이 아쉬웠지만, 지금은 새로운 메타에도 잘 적응한 것 같다.
T1과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르기 전부터 ‘누굴 만나도 이길 것 같다’는 자신에 차 있었다. T1전을 준비하면서 정말 다양한 구도를 연습했다. 웬만한 구도는 이론을 충분히 정리해놓은 상황이었기에 실제 경기에서도 좋은 결과가 나왔다. 딱 하나 오차가 있었던 건 칼리스타다. T1이 밴을 할 줄 알았는데 안 하더라.
담원 기아와의 결승전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1세트는 역전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2세트는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경기였다. 역전당하면서 우리 기세가 확 꺾였다. 3세트 때 1레벨에 ‘로켓 점프(W)’를 찍은 건 경기 결과에 큰 영향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트리스타나는 세나·탐 켄치와 대결할 때 어떤 스킬부터 찍든 라인을 무조건 받아먹어야 한다.”
서머 시즌 목표? 우승과 펜타 킬!
“서머 시즌 목표는 우승이다. 개인적으론 펜타 킬을 많이 해보고 싶다. ‘젠지는 룰러한테 펜타 킬을 양보 안 한다’는 밈이 생긴 후부터는 팀원들이 더 킬을 양보 안 해준다. 우리는 시야 장악 타이밍을 보완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상대방의 시야를 지우며 나가야 할 타이밍에 파밍을 한다든지 한다. 라인전이나 오브젝트 챙기기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본다.
내가 잘할 때도, 못할 때도 늘 똑같이 응원해주시는 팬분들께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싶다. 내 개인방송에도 찾아와주시고, 거기서 채팅도 많이 쳐주신다. 팬분들께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드리겠다. 항상 보내주시는 응원에 다시 한번 감사하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