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 A는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컴퓨터 게임에만 빠져 있더니 이제는 학교도 가지 않으려 한다. 부모는 A가 중학교 때까진 매우 모범적인 학생이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가 없다. 특목고 입시를 준비했고 이에 낙방한 후 실의에 빠진거려니 생각하고 시간이 지나면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기다렸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진 않고 오히려 심해져만 간다. 작년까지 특목고 준비로 인해 새벽 2시까지도 학원에 다니며 싫은 내색을 안보이던 아이였다. 부모도 공부에만 매진토록 강요하였지만 이제는 공부는 안 해도 좋으니 고등학교라도 무사히 마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A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특목고에 불합격한 게 정말 실망스러웠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준비했던 건데 그동안 노력한 게 억울하기도 하고, 저 자신에게 실망스럽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가 정말 신경 쓰였던 건 ‘부모님이 나에게 얼마나 실망하셨을까’하는 점이더라고요. 부모님은 저에게 거는 기대가 높아요. 제가 공부 잘하는 것이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 자랑거리셨고, 저에게는 ‘과학고를 안가면 대학가기가 정말 힘들다. 좋은 대학은 아예 포기 하는 게 나을 거야. 우리나라에서 좋은 대학에 못 가면 직업도 못 갖고 평생 후회하며 살게 될 거야’ 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기를 쓰고 공부했어요. 사실 전 과학에 그렇게 흥미가 있는 편도 아니고 해서 들어가도 좀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주변에 공부 잘하는 친구들도 다들 과학고, 영재고나 외고를 준비하니 저도 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시험이 끝나고 나니 목표를 상실한 기분이 들었고, 부모님도 시험이 끝나고 나니 제가 실망했을 것을 염려하여 공부하란 소리도 덜 하셨고, 게임을 하다 보니 너무 재미가 있더라 등등.......
A 이야기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호소하는 아주 흔한 스토리 중 하나다. A는 중학생으로서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가치’였고, 그 가치를 위하여 매우 열심히 노력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 가치는 아이의 내면에서 진정 원하는 가치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원했고, 사회가 인정해 주는 가치였던 거다. 우리나라처럼 유교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전통의 사회에서 특히 빠지기 쉬운 오류 중의 하나다. 가족이나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과 ‘자신의 내면’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혼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 추구 활동에서 뭔가 시련을 경험하는 순간 모두가 무너져 버린다.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였어요’ 하며 저항한다. 이제야 부모는 ‘그렇다면 하고 싶은 게 뭐지? 그걸 해 보렴’ 하지만 대개는 ‘나도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리곤 방황이 시작된다.
가치의 영역은 매우 다양하다. 자기가 원하는 삶이 성취 영역에서의 성공일 수도 있고, 사회적, 가족 간의 역할일 수도 있고, 예술, 사랑, 인정, 이타성 등 관계의 영역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지시하는 방향이 아닌 자신의 내면이 가리키는 방향이 가려내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래야 힘든 역경도 이겨낼 힘이 생기고 설사 중간에 길을 잃더라도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가 있고, ‘기꺼이’ 행동 할 수 있다.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이 된다. 한참 길을 가다가 ‘이 길로 가고 싶은 게 아니었어’하는 일은 줄여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스스로에게 질문하도록 한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사회적으로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나에게 중요한가?’
‘그림자 마녀에게 자신의 진짜 얼굴을 빼앗긴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 동화가 떠오르는 아침이다.
이호분(연세누리정신과 원장,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 무기력한 아이 # 게임만 하는 아이 # 하고 싶은 게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