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이용빈 의원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약하다 산화한 윤상원 열사의 일기를 책으로 발간해 광주 5·18 망월묘역 윤 열사의 묘지에 헌정했다고 18일 밝혔다.
이 의원은 윤 열사와 그의 부친 윤석동 선생의 일기를 직접 책으로 엮은 황광우(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작가와 함께 윤 열사의 묘지를 찾았다.
30년의 짧고 굵직한 삶을 마칠 때가지 윤 열사는 10권의 일기를 남겼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쓰기 시작한 그의 일기를 ‘광주’에 천착한 황 작가가 책으로 펴낸 것이다.
윤 열사는 1950년 9월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마을(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천동마을)에서 아버지 윤석동과 어머니 김인숙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재학하던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선배 김상윤(녹두서점)을 만나 사회운동에 관심을 처음 갖기 시작했다.
첫 직장이던 서울 주택은행을 6개월 만에 그만 두고 광주로 돌아온 그는 광천공단의 한남플라스틱, 양동신협에 잇따라 취업했지만 사회개혁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79년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설득으로 들불야학 강사로 일반사회를 가르쳤다. 1979년 10·26 사건 직후에는 전국 민주노동자연맹 준비위원회에 참여한 바 있다.
이듬해 1980년 계엄해제를 외치는 5·18이 발발하자 시민군 대열에 적극 참여한다. 10일간의 5·18민주화운동 기간 민주투쟁위원회 대변인과 ’투사회보’ 발행인으로 활동하다가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 본관 2층 민원실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그는 1978년 앞서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치렀고 그를 위해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옥중에서 쓴 시 ‘묏비나리’ 가사를 일부 가져와 전남대 학생 김종률(전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씨가 5·18 다음해인 1981년 곡을 붙인 노래가 5·18을 상징 민중가요가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 의원과 황 작가는 1980년 5월 27일 마지막까지 옛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산화한 15인의 시민군을 한데 모은 영정사진도 각각의 묘지에 헌정했다. 광주 광산구를 지역구로 둔 이용빈 의원의 국회사무실이 국회의원 회관 527호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 의원은 15인의 시민군 영정 헌정식을 하게 된 취지에 대해 “최후의 항쟁일이었던 27일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15명의 시민군 이름은 40년동안 제대로 불려지지 못했다”며 “그들의 이름을 한명 한명 불러주자는 의미에서 영정을 이들의 묘지에 헌정했고 그들 중에는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교 1학년이 다섯명이 있었다”고 밝혔다.
1980년 당시 고등학교 1학년으로 교련복을 입고 시위에 함께 참여했던 이 의원은 “당시 계엄군은 시민군을 폭도라고 주장했지만, 폭도가 아닌 교련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았다”며 “그들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부채의식으로 5월 광주를 잊지 말고 그날의 진실을 밝히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의원은 또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라는 윤상원 열사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면서 “우리가 윤상원 열사를 얘기하는 것은 시민군의 대변인으로서 마지막까지 광주시민을 대변했던 인물로 그를 통해 5월 광주의 의미를 되새기고 당시 희생된 시민군의 넋을 기억하자는 의미이다”고 덧붙였다.
시민군 15인은 문재학, 안종필, 박성용, 김종연, 서호빈, 유동운, 박병규, 김동수, 민병대, 윤상원, 박진흥, 문용동, 이정연, 홍순권, 이강수씨로 시민군이 본부로 사용하던 옛 전남도청을 사수하다가 숨졌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