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학창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주시어 뒤늦게 ‘선교’라는 두 글자에 마음이 닿았지만 의욕보다는 두려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1967년 개정간호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아프리카의 슈바이처 박사 이야기를 하며 “우리도 아프리카에 가서 돕자”고 내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런데도 “한없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이 감히 선교를 운운하다니”하며 애써 피해 왔었다. 게다가 “내가 아프리카에 가야 한다고 말했으나 그동안 나를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고 항변도 했다.
기도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래,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보자”라고 결심했다. 그러고는 오랜 세월 한국에서 사역하셨던 한부선 선교사와 간하배 교수, 박윤선 목사를 만나 자문을 구하고 양영배 목사에게도 “좋은 방안을 주시라”고 의뢰했다.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해주고 도움도 주셨다. 그러나 일의 진척은 없었다.
그렇게 또 몇 해가 지났다. 1982년엔 악성 갑상샘 항진 증세로 인해 수술도 할 수 없어서 약으로 병을 다스리다 역물 알레르기 증세가 보였다. 중환자실에 입원 닷새간 치료받으면서 레디오액티브 아오딘 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다. 레디오액티브 아오딘은 갑상샘 활동을 모두 파괴하는 치료다. 6개월을 치료받았다.
그러고 나서 “이제는 아프리카에 가도 된다”는 의사의 허락을 받았다. 나는 한국 월드컨션선교회에 파송 신청을 하고 뉴욕에 소재한 아프리카 내지 선교회에 가서 2주간, 워싱턴주 시애틀에 있는 월드컨션선교회 본부에서 1주간 훈련을 받았다. 거의 8000문항에 이르는 심리 테스트를 받고 심리학자와의 면담을 거쳐 “선교사로 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12년간 미국 이민 생활을 뒤로 하고 미국 시민으로서 아프리카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나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자였다. 필라델피아의 중앙교회, 한국 연동교회·월드컨선선교회에서 파송 예배를 잇달아 드리고 1985년 3월 뉴욕 케네디 공항에서 아프리카로 출발했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나니 12년에 걸친 미국 생활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미국인들을 간호하면서 영어로 모든 일을 감당하게 해 주신 것에 감사드렸다.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흑인들을 대하게 하신 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보다 더욱 감사한 것은 힘든 고비마다 하나님이 동행하며 힘을 주신 데에 감사를 드렸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우간다 선교를 염두에 둔 하나님의 심오한 뜻이 담겨 있었다. 미국 생활은 바로 우간다 선교를 위한 훈련과정의 하나였던 것이다.
암스테르담에서 8시간쯤 비행하여 케냐 공항에 착륙했다. 짐을 찾아 공항을 나서 아프리카 땅을 발로 디디는 순간 비행 내내 두려움과 의문으로 가득 찼던 머릿속은 마치 공중을 날아갈 것만 같이 맑아졌다. 마음에는 평강이 찾아왔다. 얼굴에는 기쁨으로 가득해졌다.
부활주일에 나이로비에서 한 시간 비행 거리인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착륙한 것이 1985년 4월이었다. 엔테베 공항은 불에 타 검게 그을린 천정이 곳곳에 보였다. 화장실에는 변기 외에는 휴지 등 남아 난 것이 없으리만큼 국제공항과는 거리가 멀었다.
엔테베 공항에서 목적지인 수도 캄팔라까지는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인데 가는 도중 무장 군인들이 담배를 요구하는 일이 많았다. 영국 선교사의 귀띔이 없었다면 심히 놀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울러 이곳에서 한국 사람을 만났다고 마냥 반가워해서도 안 될 일이라고 했다. 이들은 한국 사람이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북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지내라고 했다. 정리=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