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마을의 새로운 실험…도시재생과 재개발의 공존

입력 2021-05-11 09:01 수정 2021-05-11 09:38
백사마을 언덕길

보전에 방점을 둔 도시재생과 전면철거 방식의 재개발은 공존할 수 있을까. 지난 6일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백사마을’ 주거지 재생사업 추진 현장을 취재하러 가면서 내내 머리에 맴돌았던 질문이다.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개발과 인간의 체취가 느껴지는 옛것의 보존은 끊임없이 상충한다. 압축성장을 위한 경제개발과 그로 인한 수도권의 인구 집중으로 전면철거 방식의 도시 재개발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부작용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원주민들은 대책없이 쫓겨났고,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성냥갑 같은 아파트들이 도시를 잠식해갔다. 이웃사촌 같은 동네 주민들의 공동체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바쁜 일상속에 도시민의 익명성은 확대됐다. 한때 서울 전역에 뉴타운 광풍이 몰아치면서 아파트는 사는(住) 곳이 아닌 사는(買) 것이 됐다. 그 반성으로 도시재생이 시작됐다. 뉴타운 출구전략을 모색하며 백사마을 주거지 재생에 참여해온 신동우 104랑 재생지원센터장은 “일반 개발지역은 개발이익을 얻는 자와 쫓겨나는 자만 있다”며 “주민과 함께 사업을 하지 않으면 (재생이)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불암산 밑자락 구릉지에 자리한 백사마을은 1967년 도심개발로 청계천 등에 살던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형성됐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백사마을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60~70년대 경제개발 초기 이주자들, 80년대 노원구 택지개발에서 밀려난 사람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당시 살 곳을 잃은 사람들이다. 2018년 기준으로 백사마을 거주자의 80% 이상은 65세 이상 고령자이고 72%가 임차인이다. 기초생활수급 가구가 15%, 장애가구는 19.3%로 취약계층이 많다. 이처럼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삶이 팍팍해도 동네 주민들은 가족처럼 이웃간에 따뜻한 정을 나누며 살아왔다.

백사마을 언덕길

백사마을은 도시의 무분별한 팽창을 막기 위해 1971년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지어진 지 50년이 넘은 노후 주택이 많아 안전사고 위험이 높아지면서 정비사업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2008년 1월 개발제한구역이 해제된 후 전면철거 방식의 재개발사업이 계획됐다. 재개발 추진 과정에서 사라져가는 저층주거지를 보전할 필요가 있다는 사회 각계 목소리가 커지면서 다각적인 논의가 진행됐고 서울시는 2011년 백사마을 주거지 보전사업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2012년 주거지보전 구역 지정, 2013년 타당성 조사 등을 거쳐 주거지보전구역 임대주택에 대한 디자인가이드라인과 기본설계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사업시행자(LH)의 무리한 정비계획 변경 요구와 주민갈등으로 사업이 장기간 정체됐다. 2017년 서울주택도시공사(SH)가 새 사업시행자로 선정되면서 사업이 정상화됐지만 2018년 국제지명공모방식으로 선정된 공동주택단지 설계안을 두고 일부 주민들이 저층 위주의 아파트보다는 평균 층수 16층 높이로 건립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면서 주민간 갈등이 다시 고조됐다. 서울시는 사업이 더 이상 정체되지 않도록 적극적인 중재와 해결에 나섰고, 지역특성과 주민요구 사항을 반영한 정비계획을 수립했다.
백사마을 정비사업 조감도

서울시가 지난 3월 총면적 18만6965㎡의 ‘백사마을 재개발정비사업’ 사업시행계획을 인가하면서 12년만에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게 됐다. 서울시는 전국 최초로 ‘주거지보전사업’ 유형을 도입, 재개발 사업과 연계해 백사마을 고유의 정취와 주거·문화생활사를 간직한 지형, 골목길, 계단길 등의 일부 원형을 보전하기로 했다. 주거지 보전사업은 백사마을 전체 부지 가운데 공공임대주택 건설이 예정된 4만832㎡에 추진된다. 484세대의 주택과 함께 전시관, 마을식당, 마을공방 등 다양한 주민공동이용시설을 배치해 수십년간 이어온 마을 공동체가 정비사업 후에도 이어질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백사마을에 있는 서울연탄은행

서울시는 2018년 백사마을 정비사업 추진을 위한 거점공간으로 ‘104랑 재생지원센터’를 열었다. 이곳은 회의실, 교육장, 카페 등을 갖춘 주민 열린공간으로, 주민들에게 낯선 주거지 보전사업에 대한 홍보·교육과 주민공동체 활성화 지원 프로그램 등이 진행된다. 센터에서는 ‘백사마을의 과거 그리고 현재’를 담은 회화 및 사진 전시회를 개최해 백사마을의 생활상과 주거지 보전의 의미를 되새겼다. 아울러 주민들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수집해 마을전시관을 조성할 계획이다. 신동우 센터장은 “백사마을에는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녹아있다”며 “근현대사가 압축된 세 부류의 주민 30명을 인터뷰해 기록화하고, 그들이 사용한 물건 600점을 수집해 전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재생센터에는 빛이 바랜 육성회비 징수카드, 월급봉투, 이력서, 보통예금 통장, 세수대야, 미싱 등 주민들이 사용한 물품이 가득했다.

백사마을에 있는 비타민목욕탕

백사마을 주거지 보전사업은 땅의 보전, 삶의 지속을 통해 마을 재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려고 한다. 신동우 센터장은 “지역 잠재력을 활용해 공동체가 살아있는 마을을 복원하고, 저렴하고 질 좋은 주거공간을 확보하는게 우선 과제”라며 “나아가 주민들에 대한 사회적 경제 교육과 마을공동체 회사 설립으로 자족형 마을을 운영하는게 목표”라고 말했다.

백사마을의 주거지 보전사업 부지를 제외한 14만6133㎡에는 기존 주택을 철거하고 최고 20층의 아파트 단지와 기반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서울시는 백사마을에 맞는 건축 디자인이 나올 수 있도록 ‘특별건축구역’을 지정해 총 15명의 건축가를 배치한다.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되면 건축법에 규정된 일조권 등 일부 규정을 배제하거나 완화할 수 있다. 백사마을 정비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이민아 건축사는 “구릉지에 비계획적으로 형성된 가옥이지만 일조권 침해 없게 지혜를 발휘한 원형을 최대한 참조하려고 한다”며 “주민들의 삶을 지속시키게 하려면 건축으로 가능한 것, 그리고 행정적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고민하면서 설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백사마을에는 보전 가옥이 두채만 남아 있다. 나머지는 리모델링이 어려워 일단 철거한 뒤 원형을 최대한 살려 전시한다는 계획이다.

백사마을의 보전 가옥

백사마을 재정비 사업에서 주목할 대목은 소셜 믹스(Social Mix)다. 임대아파트와 분양아파트를 분리하지 않고 통합하려는 시도다. 사업시행자인 SH공사는 임대단지와 분양단지가 분리되지 않고 톱니바퀴 형식으로 맞물리도록 조성할 계획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과제다. 신동우 센터장은 “영국에서도 소셜믹스가 성공한 사례가 10%도 안된다”며 “일반 재건축이나 재개발 지역에는 맞지 않는 개념이다. 백사마을에도 소셜믹스를 해야 한다는 의지만 있지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없다. 협력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중 선임기자 j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