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교회에 먼저 감사를 드리고 싶다. 하나님께서 많은 중보자와 후원자들을 통해 우물 98개를 파도록 허락해주셨다. 펌프 1개를 설치하는데 1만 달러가 드는데 영락교회의 후원으로 펌프 여섯 군데를 설치했다. 이를 통해 지역민들 삶의 질이 크게 호전됐다.
선교사로 서원한 것은 잊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기억하셨다. 미국 땅에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 아프리카에 간다고 했지.”
개정간호학교를 졸업하고 2년 남짓 모교에서 전임강사로 교편을 잡았다. 1970년대 초반 의료인들에 대한 이민 문호가 활짝 열리면서 나는 1973년 취업이민 대열에 합류했다. 내가 미국 취업비자를 받은 것을 보고 기뻐하셨던 아버지는 내가 미국 가는 것은 못 보시고 같은 해 3월에 소천하셨다.
나는 미국 취업비자를 받은 친구 윤미라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에선 필라델피아 롤링 힐 병원에서 일했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정식 취업하기 위해서는 미국 간호사 국가고시를 통과해야 했다. 그래서 항상 마음속에 부담감이 있었다. 다행히도 좋은 수간호사 밑에서 일했기에 다소 위로가 됐다.
함께 미국에 간 미라와 함께 아파트에서 생활하며 김치가 먹고 싶어 고생하며 마음이 불편해 기도하면서 울기도 여러 번 했다. 하나님은 내가 언어를 빨리 습득하고 미국 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여러 모양으로 훈련하셨다.
당시는 젊음이 넘치던 시기라 잠 잘 시간도 없이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보니 몸에 무리가 왔다. 병원에서 근무했지만 그렇다고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이민 온 한인들은 하루빨리 정착하기 위해 몸살이 나도 병원에 가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감기가 심해서 할 수 없이 약이라도 먹으려고 미국인 의사에게 전화하면 사나흘 후에나 예약을 잡을 수 있으므로 조금 낫는다 싶으면 진료예약 날짜를 깜빡 잊어버리거나 전화 통보도 없이 일부러 가지 않는 일이 잦아 한인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좋지 않았다.
한인 의사 몇 명이 한인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서재필기념의료원을 1976년 창설했다. 나는 미라와 함께 초창기부터 간호사로 합류했다. 일하면서 만나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힘든 이민 생활 이겨내시라”고 말하곤 했다. 몇 주 또는 몇 달 후 의료원을 다시 방문한 사람들 가운데 교회에 나간다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나는 필라델피아 중앙교회가 태동 될 무렵 개혁교회에서 중앙교회로 적을 옮겨 전도사 일을 맡았다. 일인 다역으로 늘 분주한 삶을 살았다.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 여러 모양으로 도왔다. 돈도 많이 썼지만 다 해결하진 못했다. 하루는 마음이 무거워 조용한 집을 찾아가 기도를 시작했다. 3일간 금식기도를 했는데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3일째 되는 날 오후 “너 아프리카에 간다고 했지”라는 주님의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정리=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