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저녁 8시 21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케이팝 스퀘어 대형 LED 전광판에 광고가 일순 멈췄다. 광활한 초원을 배경으로 동이 트는 애니메이션이 등장하자 지나가는 시민들이 길을 멈추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노란색이 한없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해였다. 해는 마치 고흐의 붓질처럼 방사형으로 꿈틀거리듯 커지더니 이내 전체 화면을 노란색으로 덮었다. 그러곤 전광판엔 이런 메시지가 나타났다. “Remember you cannot lookat the sun or death for very long(태양 혹은 죽음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음을 기억하라).”
영국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 그는 현존하는 작가 중 작품 가격이 가장 비싼 작가이자 84세의 노익장 이다. 2018년 그의 회화 작품 ‘예술가의 초상’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019억원에 팔렸다.그런 그가 코로나 시대 어떤 젊은 작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미술 모델을 제시했다. 한국 서울의 코엑스, 영국 런던의 피커딜리, 미국의 뉴욕의 타임스퀘어, 로스앤젤레스(LA)의 펜드리 웨스트 할리우드, 일본의 도쿄의 신주쿠 등 전 세계 5개 도시의 가장 핫한 야외 전광판에 아이패드로 그린 신작 애니메이션을 동시에 선보인 것이다. 2분 30초짜리 이 영상은 5월 한 달 간 매일 같은 시간에 보여준 뒤 사라지는 일종의 일시적 미술이기도 하다.
서울과 런던과 LA에서는 오후 8시21분, 뉴욕은 밤 11시 57분, 도쿄는 오전 9시에 현지시간으로 영상이 상영 된다. 서울은 기억(ㄱ)자로, 런던은 곡면으로, 뉴욕은 76개의 스크린을 갖추는 등 나라별로 전광판 특성도 다르다.
이 전시는 작가이자 기획자인 조셉 오코너 예술감독이 꾸린 공공미술 프로젝트 시르카(CIRCA)에 의해 탄생했다. 시르카는 지난해 10월부터 런던 피커딜리와 온라인을 통해 중국 작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 등의 여러 작가의 디지털 아트를 선보였다. 이것이 이번에 세계 5개 도시로 확대됐으며 앞으로 이탈리아 밀라노, 스페인 마드리드 등이 추가된다. 국내 협력 기관으로는 CJ파워캐스트와 바라캇 컨템포러리 갤러리가 참여했다.
시르카는 5개 도시로 확장한 버전에서 그 첫 작가로 80대이면서도 ‘가장 마음이 젊은’ 거장 호크니를 초대했다. 호크니는 이미 2010년부터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려오는 등 매체를 확장하는 실험을 해왔다. 애니메이션 제작은 이번이 처음이다. 런던과 LA에서 활동해온 작가는 지난해부터 프랑스 노르망디로 작업실을 옮겼다. 인상파 화가들이 반했던 찬란한 태양에 본인도 반했다. 해를 주제로 한 작업을 지난 3월 책 ‘취소 불가의 봄’으로 출간했고 이번엔 애니메이션도 선보인 것이다. 영상에서 선보인 해돋이는 ‘코로나 대봉쇄’로부터 풀려나기 시작한 많은 국가들에 강력한 희망과 협력의 상징을 제시한다. 백남준아트센터 김성은 관장은 2일 “애니메이션은 전광판에 가장 어울리는 형식”이라고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몇 가지 점에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 예술의 신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우선 상업광고의 장인 전광판을 예술의 무대로 끌어온 점이다. 오코너는 앞으로 매달 작가를 바꿔 매일 그 시간에 예술작품을 선보이기로 각 도시의 협력을 끌어냈다. 6월에는 미국 작가 니키타 게일이 선정됐고 7월에는 영국 큐레이터 노만 로젠탈이 선정한 작가의 작품을 선보인다. 8월에는 한국 작가가 참여한다. 오코너 감독은 1일 국내 언론과 가진 줌 인터뷰에서 “자본의 시간을 2분간 멈추고 공적인 연대의 시간을 갖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유진상 계원예술대 교수는 “팬데믹 이후 예술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그 해답의 하나가 이번에 나온 것”이라며 “가장 대중적이고 잘 알려진 장소에서 예술적 메시지를 던지는 또 하나의 플랫품이 마련됐다. 이걸 예술가들이 연대하는 공간으로 삼을 수 있어 더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