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대유행 여파로 코스피가 바닥을 쳤던 지난해 3월 중순 국내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 업비트에서 600만원까지 빠졌던 비트코인 가격이 지난달 14일 사상 최고가인 8199만4000원을 기록하며 저점 대비 12배 넘게 뛰었다. 이후 각국 정부의 규제 움직임과 맞물려 2주 만에 약 5500만원까지 33% 급락했지만 금세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일순간 강한 펀치를 맞고 녹다운당한 권투선수가 투지를 불태우며 무겁게 몸을 일으키는 듯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끝인가 싶었던 비트코인이 반등에 나선 시점이 “비트코인은 ‘폰지사기’(불법 다단계 금융사기)”하는 공개 비판이 나온 직후라는 점은 공교롭다. 베스트셀러 ‘블랙스완’의 저자 나심 탈레브 뉴욕대 교수는 지난 23일(현지시간) 미국 CNBC방송에서 “비트코인은 순전한 투기일 뿐이고 게임이나 다름없다”며 “비트코인 가격은 제로(0)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언젠가 거품이 터질지 모른다는 공포와 끊임없는 경고에도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 가격이 쉽사리 빠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상장기업은 보유 자산과 매출, 영업이익, 성장성 등을 토대로 적정 주가를 도출하지만 애초 ‘펀더멘털’이랄 게 없는 ‘코인’들의 적정가격을 찾는 작업이 가능할까.
키움증권 리서치센터 투자전략팀은 최근 보고서에서 “현재 수많은 암호화폐가 매매되는데 비트코인조차 전통 자산과 뚜렷한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암호화폐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명백하게 밝히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누구도 명쾌한 답을 내지 못하는 상태에서 코인 가격은 철저하게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다. 코인 공급량에 비해 사려는 사람이 많으면 가격이 오르고, 그 반대면 가격이 내리는 식이다. 지금 코인 시장이 강세를 보이는 건 “코인을 사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국내 4대 암호화폐 거래소로 불리는 업비트, 빗썸, 코빗, 코인원의 전체 이용자는 올해 3월 말 기준 511만여명으로 이 중 절반에 달하는 250만여명이 올해 1분기 신규 가입자다.
심수빈 김유미 키움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말부터 상승세를 보였던 비트코인은 올해 1분기 국내 주식시장과 상품시장이 횡보하는 흐름을 보이는 가운데 상승 지속해 사상 최고가를 기록다”며 “비트코인을 시작으로 이더리움 등 알트코인(비트코인을 제외한 모든 암호화폐)도 상승 흐름을 보이면서 암호화폐 시장의 전반적 강세가 나타났다”고 해설했다.
투자자들이 코인을 사는 이유는 대부분 ‘가격이 오를 거 같아서’다. 그런 기대 혹은 신뢰를 일으키는 배경은 뭘까. 기축통화인 달러 약세에 따른 대안화폐 또는 가치저장수단으로의 부각, 기관투자자의 잇단 유입, 주요 기업의 결제수단 채택 등이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심 연구원 등은 지난해 코로나19 확산 이후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이 대규모 양적완화에 나서면서 화폐가치 하락에 대한 우려가 부각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가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를 밀고 나가면서 기대 인플레이션이 상승했고, 이에 따른 화폐가치 하락 우려 속에서 비트코인 수요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비트코인이 세상에 등장해 주목받은 시기가 미 연준의 양적완화 시행으로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던 2009년이었다는 점은 우연으로만 보기 어렵다. 지급결제 기능을 가지고 있던 비트코인은 이미 그때부터 대안화폐로 언급돼왔다. 암호화폐가 폭발적 관심을 일으킨 시기는 비트코인 가격이 단숨에 급등한 2017년 말부터다. 그해 7월 400만원대였던 비트코인은 11월 말부터 수직 상승을 시작해 이듬해 1월 초 3000만원에 육박했다.
최근 암호화폐는 막연한 호기심의 대상을 넘어 점점 지위가 격상되는 모습이다. 주요 기관투자자가 앞다퉈 암호화폐 시장에 발을 들이면서 제도권 편입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 세계 10대 헤지펀드 중 한 곳인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스가 비트코인 선물 시장에 진출했고, 11월 미국 대형 투자사 구겐하임 펀드가 비트코인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올해 3월에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이 비트코인 선물 투자 사실을 공시했다. 골드만삭스는 암호화폐 전담 데스크를 가동했고, 모건스탠리는 비트코인 펀드 출시 계획을 밝혔다.
여기에 굴지의 기업들이 비트코인을 자산으로 편입하거나 결제수단으로 채택하면서 암호화폐 수요가 커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자극했다. 지난해 8월 미국 소프트웨어 기업 마이크로스트래티지가 2억5000만 달러어치 비트코인을 매수한 데 이어 페이팔, 비자, 마스터카드 등은 비트코인을 결제수단으로 이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비트코인 15억 달러어치 매입 사실과 추가 투자 의향을 밝힌 올해 2월 테슬라의 발표는 암호화폐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끌어올린 이벤트였다.
비트코인이 제도권으로 파고드는 속도도 빠르다. 캐나다는 비트코인 ETF(상장지수펀드)를 상장했고, 미 증권거래위원회도 비트코인 ETF 상장을 심사 중이다. 올해 초 프란시스 수아레즈 미국 마이애미 시장은 포브스 인터뷰에서 “비트코인으로 공무원 급여를 주거나 세금을 낼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심 연구원 등은 “암호화폐를 지급결제 수단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2017년 비트코인 급등 시기와 차별화되는 요소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비트코인을 결제수단으로 도입하는 기업이 늘고 있기는 해도 사용 범위는 아직 제한적이다. 실제 거래 사례도 드물다. 미국 게임회사 ‘밸브’는 2016년 4월 자사 PC게임 온라인 유통 플랫폼에서 비트코인 결제를 도입했지만 1년8개월 만인 이듬해 12월 이를 중단했다. 높은 결제 처리 수수료와 불안정한 비트코인 가격이 이유였다. 테슬라 등도 결국 밸브와 같은 이유로 비트코인 결제 방식을 철회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암호화폐가 보편적 결제수단으로 자리잡기에는 사용자층이 좁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올해 1분기 국내 4대 암호화폐 거래소 신규 가입자는 약 80%가 20~40대다. 이들 연령대 중에서도 20·30대가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하지만 기관과 기업이 암호화폐 시장 성장에 맞춰 발 빠르게 대응하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발전 가능성을 재단하기는 이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뉴욕 멜론은행과 독일 최대 은행 도이체방크는 올해 2월 암호화폐 보관 서비스를 준비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국내 주요 시중은행도 지난해부터 디지털 자산 수탁 서비스 제공을 위해 관련 기업에 투자를 진행하거나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일부는 암호화폐 금융 서비스로 영역을 확대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심 연구원 등은 “암호화폐가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금융 서비스까지 확장된 만큼 주요 암호화폐 및 금융 플랫폼 활성화 기대는 유효하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다만 “암호화폐가 가파르게 오른 가운데 금융 당국의 부정적 견해 표명과 규제 관련 이슈는 시장 내 변동성을 확대시킬 수 있어 유의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