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미치는’ 날이면 그가 선 골문 뒤 팬들은 무서울 게 없었다. 팀이 궁지에 몰리고 상대 슈팅이 빗발칠 때마다 그의 손끝은 오히려 더 빛났다. 팬들은 그의 이름을 뒤집어 ‘신(神)’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다음달 1일 은퇴식을 앞둔 골키퍼 신화용(38)의 이야기다.
신화용이 골키퍼 장갑을 끼고 경기에 나선 지는 2년도 더 지났다. 마지막 경기가 수원 삼성에서 뛰던 2018년 12월 2일 제주 유나이티드전이니 은퇴식이 열릴 날로부터 무려 881일 전이다. “그때만 해도 끝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고 그는 말했다. 최근 그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일선 현장에서 골키퍼 코칭 무료클리닉 등 재능기부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국민일보는 은퇴식 일정이 발표된 지난 29일 그와 통화했다.
키 작은 골키퍼
대학 진학 당시 신화용의 키는 채 180㎝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그가 국내 최고 기량의 스무 명 내외에만 허락된 프로구단 골키퍼 장갑을 낄 수 있다 믿은 이는 드물었다. 신화용은 “부모님도 선수를 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 대학에 가서 체육선생님을 해보라고 했다”면서 “프로 입단이 꿈이긴 했지만 스스로도 솔직히 실업팀이라도 가면 좋겠다고 여겼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그는 축구를 시작하기 전부터 포항 스틸러스의 전신 ‘포항 아톰즈’의 경기를 보러 다니던 축구 팬이었다. ‘국민학생’ 때 앞서 단거리 선수였던 그는 골키퍼 교육 경험이 있던 코치 선생님의 권유로 골키퍼 장갑을 꼈다. 신화용은 “어릴 적에도 점프력은 좋았다”면서 “장거리는 약하지만 단거리는 빠른 편이라 점프력과 순발력을 보고 코치님이 골키퍼가 맞을 거라 여긴 것 같다”고 했다.
그대로 대학 생활이 이어졌다면 이후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2004년 포항이 골키퍼 자원 부족으로 그를 부른 덕에 신화용은 프로 선수의 꿈을 이뤘다. 2년 뒤인 2006시즌 K리그 클래식 1라운드 전북 현대를 상대로 한 홈경기에서 그는 데뷔전을 치른다. 신화용은 “첫 경기는 아직도 기억난다. 무척 치열했다”면서 “얼떨결에 데뷔전을 치렀지만 선방을 많이 했고 경기도 이겼다. 실점이 하나 있긴 했지만 페널티킥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그의 프로 생활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신화용은 2000년대 후반 포항의 전성기를 함께하며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와 리그, 리그컵과 FA컵까지 K리그 선수로서 따낼 수 있는 모든 우승컵을 들었다. 이후 수원에 이적해서도 주전으로 뛰며 좋은 활약을 해 팬들의 지지를 받았다. 2018년 ACL 8강전에서 전북을 상대로 펼친 승부차기 선방쇼가 대표적이다. 그는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수원에서 선수로 우승컵을 끝내 들지 못한 점”이라고 했다.
이유 없는 실점은 없다
신화용은 기록상으로도 ‘역대급’ 수문장으로 꼽힐 만하다. 리그 통산 337경기에서 경기당 1.05실점을 했다. 총 413경기를 뛴 이운재에 이어 골키퍼 통산 출장횟수 6위다. 무실점 경기도 전설적인 골키퍼 신의손(사리체프)과 함께 통산 114경기로 공동 6위다. 한국프로축구연맹에 따르면 특히 300경기 이상 치른 골키퍼 중 페널티킥에서 실점하지 않는 비율은 25.6%로 역대 4위다. 역시 페널티킥에 강했던 포항 선배 김병지보다도 한 계단 높은 순위다.
좋은 골키퍼가 되기 위한 신화용의 방법론은 ‘부단한 연구’다. 그는 “따져보면 실점의 95%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냥 하는 실점은 없다”면서 “상대 선수를 분석하고 내가 잘 안 되는 장면을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실수를 하더라도 왜 그런 상황이 나왔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걸 연구 분석하면서도 아무렇잖게 다음을 준비하는 배짱이 있어야 경쟁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예민하지 않으면 좋은 골키퍼가 될 수 없다”는 것 역시 신화용의 지론이다. 경기장에서 닥칠 온갖 요소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실점 확률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예민해야 실점 위기가 닥치기 전에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 바람과 잔디, 공 상태에 상대 선수 동작에까지 다양한 요소에 민감하게 반응하려면 예민해야 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눈여겨보는 후배 골키퍼는 아무래도 한솥밥을 먹은 포항 후배 강현무와 수원의 양형모다. 그는 “스타일로 따지면 현무(강현무)가 가장 비슷하긴 하다”면서 “현무도 저한테 ‘형한테 항상 보고 배웠다’고 얘기한다”며 웃었다. 그는 “현무의 캐칭은 오히려 저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면서 “절 보고 배웠다지만 제 장점도 흡수한 데다 본래 가진 안정감도 있어서 저보다 더 잘될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후반전 맞은 축구인생
지난달 신화용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은퇴 결정을 공식화했다. 2018년 수원과의 계약이 끝난 뒤 허리 디스크 부상에서 회복하는 일이 생각보다 순조롭지 못했다. 지난해 수술 뒤 재활에 나섰지만 이번 겨울 이적시장에서 끝내 입단 제의를 받지 못했다. 신화용은 “사실 은퇴 보도 뒤에 다른 프로구단에서 와달라는 연락이 오긴 했다.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셈”이라면서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다. 뒤늦게 번복하는 건 제 성격상 맞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골키퍼 코치 1급 자격시험을 계획하고 있다. 코로나19라는 변수가 있지만 계획대로라면 올해 안에도 취득할 수 있다. 신화용을 원하는 프로구단이 있다면 이를 경우 다음 시즌 당장 그를 경기장에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1일 열리는 그의 은퇴식은 수원과 포항 구단이 합동으로 준비했다. 신화용은 “수원에서 먼저 K리그 레전드로서 예우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포항에서도 그 뒤에 연락이 왔다”면서 “쉽지 않은 상황에 팬들에게 인사할 기회를 마련해줘서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두 구단이 한 선수의 은퇴식을 함께 치러주는 일은 과거 전북과 대전 시티즌(현 대전 하나시티즌)이 함께 했던 최은성의 은퇴식 말고는 K리그에서도,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드물다. 양 팀 선수들은 경기에 앞서 도열해 신화용의 은퇴를 축하할 예정이다. 수원은 그에게 공로패를, 포항은 꽃다발을 각각 준비했다. 다만 경기장 위 식전행사를 자제하라는 연맹 방역지침 탓에 잔디를 밟지는 못한다.
경기장에서 본 지가 2년도 넘었지만 팬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수원 팬들은 주기적으로 SNS를 통해서 메시지를 주신다”면서 “포항 팬들 중에도 챙겨주시는 분이 있다”고 말했다. 포항 구단 마스코트 ‘쇠돌이’는 최근 공식 인스타그램에 신화용의 은퇴를 기념하는 장문의 글을 정성스레 남기기도 했다. 그만큼 그가 팬들에게 사랑받은 선수라는 이야기다. 그는 “지인이 쇠돌이 글을 보내줘서 읽어봤다”며 웃었다. 쇠돌이는 신화용의 은퇴식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그는 “수원에서도 팬들 앞에서 우승컵을 들고 세리머니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이어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지도자로서든 코치진으로서든 팬들과 함께 우승 세리머니를 하는 것도 뜻깊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팬들에게 남기고픈 말을 묻자 신화용은 “이렇게 축하받으며 떠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면서 “돌이켜보면 감사하지 않은 일이 없다. 모든 게 내가 주인공이었던 것만 같다”고 말했다.
“팬분들과 함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많은 시간 보냈는데…. 감사하다는 말부터 드리고 싶어요. 선수로서는 이렇게 커리어 마감하지만 다른 모습으로라도 기회가 되는대로 경기장에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