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개발, 끝을 보라” 헛발질하다 백신 골든타임 놓쳤다 [이슈&탐사]

입력 2021-04-29 14:54 수정 2021-04-29 17:51
SK바이오사이언스가 개발 중인 코로나19 백신 시약 제품. 청와대사진기자단

“우리의 치료제와 백신으로 인류의 생명을 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문재인 대통령, 지난해 4월 9일 경기도 성남 한국파스퇴르연구소에서)

문 대통령이 지난해 이곳을 찾은 이유는 ‘코로나19 치료제·백신 개발 산학연 및 병원 합동회의’를 주관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신규 코로나19 확진자는 39명. 1차 유행이 끝나가는 국면이었다. 한국식 K방역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정부의 자신감이 한층 높아진 시기였다. 4·15 총선까지 6일이 남아 있었다.

문 대통령은 현장에서 “일본의 수출 통제 당시 정부가 범정부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소재·부품의 자립화에 성공했다”며 “치료제, 백신 개발만큼은 끝을 보라”고 말했다.

이후 일은 대통령 말대로 진행됐다. 정부는 ‘코로나19 치료제·백신 개발 범정부지원단’(6월 범정부위원회로 이름이 바뀜·이하 범정부위원회)을 구성했다. 정부는 치료제·백신 개발을 거론할 때마다 대통령이 말한 ‘끝까지 지원한다’를 강조하고 있다.

한국은 왜 코로나19 백신의 도입 시기를 놓쳤나. 국민일보 취재팀이 지난해 정부 보도자료와 브리핑을 분석하고 담당 공무원, 정부에 자문한 민간 전문가들을 취재한 결과 백신에 관한 정부 방점이 해외 도입보다 국내 개발에 찍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백신과 치료제를 빠른 시일 내 자체 개발해 K방역을 완성시키겠다는 구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비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매달리다 백신 확보의 기회를 놓쳤다고 지적한다.

투 트랙 기조로 시간 허비

대통령의 “끝을 보라” 발언 보름 뒤인 24일 정부는 ‘코로나19 치료제·백신 개발 범정부지원단 본격 가동’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지원단이 1차 회의를 열고 치료제와 백신 개발 현황을 점검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자료에 모더나 등 7건의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라는 내용이 있지만 도입 계획은 없었다. 정부는 7월까지 잇따라 백신 자체 개발에 관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코로나19 치료제·백신 개발기업 애로사항 신속 해결’(5월 6일) ‘코로나19 완전 극복을 위해 치료제·백신 개발 끝까지 지원!’(6월 3일) ‘코로나19 치료제·백신 개발에 1936억원 투입’(7월 9일) 등이다.

해외 개발 백신 도입 검토는 6월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6월 3일 ‘코로나19 완전 극복을 위한 치료제·백신 등 개발 지원 대책’ 자료에 ‘해외 개발 치료제·백신 수급 확보’ 관련 내용이 나온다. 이때도 우선순위는 자체 개발에 있었다. 범정부위원회에 민간 전문가로 참여한 성백린 백신실용화기술개발사업단장(연세대 의대 특임교수)는 “6월 22일 백신 전문위원회에서 글로벌 백신 공급 방안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면서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정부 또는 기업이 직접 수입하는 것보다는 국제 백신 공유 프로젝트인 코백스 퍼실리티에 참여하는 논의를 했다”고 말했다.

범정부위원회는 6월 29일 ‘백신 도입 특별전담팀(TF)’을 구성했다. 이어 8월 21일 ‘코로나19 백신 도입 본격 추진 결정’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3상 진입 등 성공 가능성이 있는 경우 선수금을 지급, 우선 확보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9월 15일 정세균 국무총리가 국무회의에서 해외 백신 3000만명분 확보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국민 60% 예방접종을 목표로 1000만명분은 코백스를 통해, 2000만명분은 글로벌 기업과의 협상을 통해 선구매 방식으로 확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문 대통령도 같은 날 내부 참모회의에서 “코백스, 글로벌 제약사 등을 통해 충분한 양의 백신을 확보해 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의료진들이 지난달 17일 충청남도 천안 서북구 실내테니스장에 마련된 예방접종센터에서 백신 접종 모의 훈련을 준비 중이다. 사진공동취재단

여러 상황을 종합하면 지난해 8~9월 ‘국내 개발’과 ‘해외 백신 도입’이라는 ‘투 트랙’ 기조가 정부 내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의경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은 8월 26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백신 국내 개발 목표는 내년(2021년) 연말”이라면서 “그와 동시에 외국 개발 백신을 조속히 수입하는 방법도 투 트랙으로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정부 행동은 여전히 국내 개발에 더 무게가 실려 있었다. 문 대통령은 10월 15일 코로나19 백신을 개발 중인 SK바이오사이언스 연구소를 찾았다. 그는 “다른 나라가 먼저 개발하고 우리가 수입하게 되더라도, 나아가서 코로나가 지나간다 하더라도 치료제와 백신 개발은 끝까지 성공해야 한다. 백신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개발 성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화이자 발표 뒤 자문위 열려

정부가 투 트랙 전략을 취하고 있을 때 해외에서 백신 선구매 계약이 잇따라 체결됐다. 미국 듀크대 글로벌 보건혁신센터에 따르면 영국은 지난해 5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9000만회분을 선구매했다. 7월엔 화이자와 3000만회분 계약을 맺었다. 백신 개발국이 아닌 캐나다도 8월 모더나와 화이자를 각각 2000만회분 계약했다. 싱가포르는 6월 모더나 백신을 선구매한 뒤 8월에 화이자 백신을 샀다. 이스라엘도 7월 모더나와 계약을 맺었다.

한국은 아스트라제네카와 지난해 7월 협력 의향서(LOI)를 맺었지만 실제 계약은 11월 27일 체결했다. 화이자와 12월 23일, 모더나와 12월 31일 계약을 했다. 지난 24일 기준 국내에 도입된 분량은 387만회분이다.

구매 시점에 차이가 난 이유는 우리는 11월이 돼서야 어떤 백신을 도입할지를 본격적으로 논의했기 때문이다. 11월 9일(현지시간) 화이자가 “90% 예방 효과가 있는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했다”고 발표하자 정부는 이틀 뒤인 12일 백신도입자문위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이환종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첫 회의에서 브리핑을 듣고 4일 뒤 만나서 모더나 화이자 아스트라제네카 얀센 사노피 5개 백신을 사기로 회의 두 번 만에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어 “12월에 다시 회의가 열려 노바벡스가 안건으로 올라와 도입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성백린 단장은 “지난해 9월 11일 백신 전문위원회 8차 회의가 있었는데 이때까지도 백신 구입·수급 계획이 구체적으로 없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정부는 이때도 급하지 않다는 태도였다. 지난해 11월 17일 박능후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회에서 “(글로벌 제약사들이) 빨리 계약을 맺자고 오히려 그쪽에서 재촉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우리가 백신 확보에서 그렇게 불리하지 않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5~10월 선구매 기회가 있었다고 말한다. 김성한 서울아산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이제 와서 정부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지만 지난해 5월과 8월이 중요한 시점이었던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백신 도입 주도할 조직 없었다

백신 도입 결정이 늦어진 이유는 이를 주도할 책임자와 조직이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말 백신 도입 TF가 범정부위원회 산하에 구성됐지만 결정권이 없었다. 이곳에서 활동한 정부 관계자는 “TF는 각 부처 국장급이 모여 논의했기 때문에 선구매를 결정할 수는 없었다. 장관님이나 총리님이 결정할 수 있도록 실무작업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정부 관계자도 “TF는 실무협의체 성격이며, 무언가를 결정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 아니다”고 말했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작년 여름 전문가들이 수차례 도입 이야기를 했지만 서로 뜨거운 감자 만지듯 돌리다 시간을 허비한 것”이라며 “실무 공무원을 탓하기는 어렵고 복지부 장관이나 질병관리청장이 강하게 건의하고 대통령이나 총리 등 리더가 결정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달에서야 복지부 장관을 팀장으로 하는 ‘범정부 백신 도입 TF’를 만들었다.

글로벌 제약사와의 계약 절차에 대한 방침은 11월 말에서야 공식화된 것으로 드러났다. 질병관리청 관계자는 “개발이 진행 중인 백신의 경우 일반적인 국가계약법을 따르기에는 불분명한 부분이 많아 감사원에 사전 컨설팅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하면 문제없다’는 회신을 받은 건 11월 27일”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근본 원인으로 방역 성공 자신감에 취해 있던 정부 분위기를 지목한다. 김우주 교수는 “K방역과 치료제 개발에 심취해 백신 도입 적기를 놓쳤다”며 “7~9월이 백신 도입에 가장 중요한 시기였는데 질병관리본부를 질병관리청으로 승격시키고 논공행상을 하며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렸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코로나19 유행 초기 국산 진단키트의 개발 성공이 국산 백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갖게 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지난해 10월 “K방역 핵심인 진단키트가 글로벌 시장을 선도 중”이라며 “치료제와 백신 개발도 후발 주자지만 빠르게 임상시험을 통과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백신도입자문위원회에서 활동했던 한 교수는 “진단키트 개발로 잘못된 자신감을 가졌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이낙연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월 24일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난극복 K-뉴딜위원회 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날 토론회의 주제는 '코로나19 백신 치료제 국내 개발 동향과 전망'이었다. 국회사진기자단

일부 전문가의 책임을 거론하는 의견도 있다. 백신 개발이 상당한 재원과 기술 수준, 시간이 필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정권 입맛에 맞는 ‘백신 주권’ 메시지를 권력 중심에 전달한 전문가들이 있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청한 한 의대 교수는 “진짜 전문가라기보다 잘 모르면서 자신의 믿음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계속 늦어지는 개발 예상 시점

국산 코로나19 백신 개발 시점에 대한 정부의 전망은 계속 달라지고 있다. 최근까지 정부 관계자들은 올 하반기 국산 백신 개발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최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지난 22일 국회에서 “국산 코로나19 백신이 올해 안에 개발될 가능성이 여전히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홍남기 국무총리 권한대행(부총리)은 지난 28일 ‘늦어도 내년 초’를 이야기했다. 손영래 중앙사고수습본부 사회전략반장은 같은 날 “내년 상반기를 목표로 지원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SK바이오사이언스 셀리드 제넥신 유바이오로직스 진원생명과학 등 제약사 5곳이 백신을 개발 중인데 아직까지 임상 3상에 들어간 곳은 없다. 정부의 지원 규모는 ‘끝까지 지원한다’ 기조가 무색할 정도로 작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올해 코로나19 치료제 임상지원에 627억원, 백신 임상지원에 687억원 등 코로나19 대응에 2627억원을 지출한다는 계획이다. 미국은 지난해 코로나19 백신 개발 프로젝트 ‘초고속 작전’을 통해 모더나 노바백스 아스트라제네카 얀센 4개 제약사에 53억달러(5조8700억원)을 지원했다.

권준욱 중앙방역대책본부 제2본부장(국립보건연구원장)은 지난 15일 브리핑에서 “당장 백신의 임상 3상 시험만을 위해서도 2000억원 이상이 소요된다고 한다”며 “저희가 연구개발 전문가와 개발회사에 그런 지원과 여건을 만들어주었는지 계속해서 반성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여당 일각에서 그동안 국산 백신에 지나친 기대를 했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민주당 한 의원은 “국내 기업에 대한 기대감이 조금 지나쳤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홍 권한대행의 ‘백신 자주권’ 발언에서 볼 수 있듯 정부의 큰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마상혁 대한백신학회 부회장은 “해외 제약사와 똑같이 시작했는데 국내 제약사들은 아직 임상 3상도 못 들어갔지 않느냐”면서 “우리 국산 백신 개발의 속도를 보고 기술력이 부족하면 포기하고 외국 백신을 빨리 갖고 왔어야 했다. 결국 그 투 트랙 기조 탓에 해외 백신 도입이 늦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슈&탐사2팀 권기석 양민철 방극렬 권민지 기자 10000g@kmib.co.kr

[왜 백신 도입 골든타임 놓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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