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29일 쿠팡을 ‘총수없는 대기업’으로 지정했다. 쿠팡은 자산 5조원이 넘어 대기업 관련 규제를 받게되지만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은 미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동일인(총수)로 지정되는 것을 피했다. 김 의장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총수일가 사익편취 규제를 받지 않게 돼 다른 정보기술(IT) 대기업과의 형평성 논란이 일고 있다. 공정위는 이와함께 현대차와 효성의 동일인 변경 신청도 받아들여 정몽구 명예회장 대신 정의선 회장을, 조석래 명예회장 뒤를 이어 조현준 회장을 동일인으로 인정했다.
쿠팡 김범석 의장 총수 지정 피한 이유
공정위는 매년 5월1일 기준으로 기업집단의 총자산이 5조원이 넘으면 대기업집단으로 지정한다.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총수일가 사익편취 규제 대상이 된다. 또 주식소유현황 등 각종 공시 의무가 부여된다.쿠팡은 2019년말 기준 자산이 3조1000억원이었지만 1년 새 전국에 100개가 넘는 물류센터 부지 가격 상승 등의 영향으로 5조8000억원으로 증가했다.
대기업집단에 지정되면 공정위는 기업의 실질적 지배자를 뜻하는 동일인(총수)을 지정한다. 쿠팡의 실질적 오너는 창업자 김 의장이다. 그는 쿠팡 10.2%의 지분을 갖고 있으며 차등의결권을 적용할 경우 76.7%의 의결권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공정위는 김 의장이 쿠팡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명백하게 인정하면서도 그를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않았다. 외국인 총수 지정 및 규제에 대한 제도가 미비하다는 이유에서다. 공정위 김재신 부위원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현행 대기업 규제가 국내를 전제로 설계돼 있어 외국인 총수를 규제하기에 미비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또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 대주주로 있는 에쓰오일 등 기존 외국계 대기업도 총수없는 대기업으로 지정한 점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공정위 내부적으로 총수 지정됐다가 벗어난 김범석 의장
공정위는 쿠팡이 자산 5조원이 넘어 대기업집단에 지정된다는 점을 파악한 이후 관행적으로 총수없는 대기업으로 지정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달 초부터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에서 ‘검은머리 외국인’에 대한 특혜 논란을 제기하면서 이 사안을 원점 재검토하기 시작했다.지난 21일에는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이 전원회의 토의안건으로 올려 이 사안을 논의했다. 조 위원장과 상임위원 3인 등 7명이 참석한 전원회의에서도 김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해야 한다와 해선 안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원회의 이후 공정위 내부 기조는 김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쪽으로 흘렀다. 공정위 수뇌부는 미국인 총수에 대한 제재 실효성을 떠나 일단 지정한 뒤 현 제도 미비점을 고쳐나가는 방향으로 잡았다. 공정위 전 고위관계자는 “전원회의 토의안건에 올린다는 것은 위원장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통과의례인 셈”이라면서 “김 의장 특혜 논란이 일자 전원회의에 올렸다는 것은 동일인 지정을 전제로 한 것으로 봐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발표 1~2일 전부터 다시 원래 방침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공정위 안팎에서 들린다. 이를 두고 코로나19 백신스와프 논의 등 중대한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을 자극해선 안된다는 정무적 판단이 끼어든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국회 관계자는 ”주한 미 대사관에서 미국인 총수 지정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알고있다”고 말했다. 결국 김 의장은 롤러코스터를 탄 끝에 총수일가 사익편취 규제 대상에서 벗어나게 됐다.
현대차와 효성은 본격 2세 시대 돌입
공정위는 현대차와 효성의 동일인 변경 요청을 받아들였다. 공정위는 그동안 대한항공 등 창업주가 사망했을 경우에만 동일인을 바꿔주던 관례에서 탈피, 두 기업의 요청을 들어줬다. 올해는 3개 기업집단에서 동일인 변경을 신청했지만 1곳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공정위는 현대차의 경우 정의선 회장이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는 등 실질적 지배력이 ‘불가역적으로 전이’된 것으로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조석래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효성 총수로 지정된 조현준 회장의 경우, 조 명예회장이 보유한 효성 지분에 대한 의결권 행사를 조 회장에게 포괄위임한 점, 조 명예회장이 고령에 건강상태가 좋지 못한 점 등을 고려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기업집단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2세들을 동일인으로 판단해 권한과 책임을 일치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밝혔다.
구체적 잣대 없는 동일인제도 수술대로
한 IT 대기업 관계자는 쿠팡 김 의장의 동일인 미지정에 대해 “의결권을 70%이상 가진 개인이 동일인이 아니면, 앞으로 누구를 동일인으로 지정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공정위는 이번 논란을 계기로 동일인 제도 전반에 대한 개선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동일인의 정의나 요건 등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 제도의 투명성이나 예측가능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공정위는 당장 외국인을 동일인으로 판단해 규제하기에는 집행가능성 및 실효성 등에서 문제되는 측면도 해결방안을 찾기로 했다. 그러나 공정위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뒤에야 개선방안을 내놓기로 하는 등 불필요한 논란을 야기했다는 지적은 피하지 못할 전망이다.
세종=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