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경기도 용인의 대한항공 연습체육관 앞마당. 벤츠 지바겐 한 대가 각진 철제 바디를 뽐내며 우렁차게 전진해 들어왔다. 높디높은 흰색 성채의 앞문을 열고 지면에 발 디딘 건 바로 정지석(26). 한 눈에 들어온 건 그의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사복 차림이었다. 운동화와 추리닝에선 발렌시아가 상표가, 체크무늬 오프화이트 셔츠 안쪽으론 길게 늘어진 금목걸이들과 펜던트가 햇빛에 반사돼 명멸했다.
마치 정지석이 절친한 농구계 ‘트렌드세터’ 최준용(27)에 소개받은 뒤 애청하게 됐다는 NLE 차파의 곡 ‘Walk Em Down’ 속 주인공이 현실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해당 곡의 화자는 갱단의 아지트로 쳐들어가 적들을 소탕한다. 정지석이 올 시즌 V-리그에서 보여준 활약도 그와 같았다. 기존의 각도 깊고 빠른 스윙에 높은 타점까지 장착한 공격, 토스를 앞쪽으로 길게 놓게 되면서 더욱 강력해진 서브, 수 싸움에 더욱 능해진 블로킹까지. 정지석은 공격종합 1위, 서브 2위, 센터 제외 블로킹 1위의 활약으로 팀의 통합우승을 이끌고 통합 MVP가 됐다.
‘난 항상 이겨, 반드시 / 절대 만족할 수 없지’
성공을 향한 그의 거침없는 발걸음엔 늘 힙합이 함께했다. 챔프전 1승 2패, 우승확률 7%의 벼랑 끝에 몰렸을 때도 구단 버스에서 내리기 전 그가 들은 노래는 DJ 칼리드의 곡 ‘All I Do Is Win’이었다. ‘이긴다’는 가사가 반복되는 훅과 빠른 비트가 매력적인 노래다. “챔프전 땐 항상 이 노래만 들었어요. 이긴다는 생각만 하고 싶었거든요.”
그가 힙합에 빠진 건 운명과 같았다. 운동선수와 힙합가수는 필드만 다를 뿐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통했다. “저는 운동선수도 예술을 한다고 생각해요. 4차 산업혁명 시대엔 기계가 사람을 대체한다고 하는데 운동선수와 정신 나간 DJ는 대체하기 힘들죠.”
첫 만남부터 강렬했다. 때는 2015년. 대한항공 주전 레프트였던 신영수(39)는 3억원의 자유계약선수(FA) 계약을 체결하곤 널찍한 지프 그랜드 체로키를 구매했다. 정지석은 아직 20세였던 시절 그 차에서 들었던 박재범의 ‘몸매’를 잊지 못한다. “큰 외제차는 처음 타봤는데, 거기서 듣는 박재범의 노래가 마치 할렘에 있는 것처럼 너무 좋았어요. 힙합을 미친 듯이 찾아 듣게 됐죠.”
18세 때 희귀한 고졸 신인선수로 밟은 프로 무대는 정지석에게 지옥과 같았다. 언제 주전이 될지 알 수 없는 막막함을 그저 견뎌내야 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와 프로팀은 웨이트부터 달라요. 너무 힘들었는데 뒤처지면 끝이니 토하고 와서 다시 했을 정도였어요.” 힙합은 그런 그에게 동기부여가 됐다. 밑바닥에서 시작해 결국 부와 명예를 이뤄내는 힙합 가사를 들으며, 정지석은 주전으로 도약하기 위해, 우승과 MVP를 위해 수년간 악을 썼다.
그렇게 연봉 3000만원의 신인은 연봉 5억8000만원을 받는 부동의 에이스가 됐다. 5평 남짓 2인 1실 숙소에 살던 청년은 40평짜리 3룸 아파트 주방에서 마르게리따 피자를 만들고 짜파게티에 채끝과 살치살을 넣어 먹는 걸 즐긴다. 잘 잡히지도 않는 택시를 기다리던 때는 지났다. 이젠 큰 맘 먹고 산 지바겐을 몬다. 고마운 팬들을 위해선 챔프전 홈경기 내내 커피차도 쏠 수 있다.
‘더 멀리 도망가자 / 네 병이 나을 때 까지 / 낯선 사람들 속에 숨지 말고 떠나자’
화려함 뒤엔 그늘도 있다. 프로선수는 매 경기 자신의 퍼포먼스를 대중들에 평가 받아야 한다. 잘할 땐 밝게 빛나지만, 부진할 땐 비난이 쏟아진다. 자신을 ‘욕심 많은 어린 아이’라고 수식한 정지석의 경우엔 가득 찬 인정 욕구를 채우지 못했을 때 느끼는 실망감이 더 크다. 그가 공식석상에서 자주 눈물지은 이유다. “올림픽 예선 땐 컨디션이 안 좋았어요. 잘하고 싶은데 안 되니 못 견딜 정도로 부담감이 커서 이란전 경기 중엔 전위에 서서 울었죠. (박)철우형이 옆에서 그걸 보고 기죽지 말라고 다독여줬어요. 챔프전 땐 서브 스윙에 문제가 생겨서 뭔가 말린 상태로 경기를 했어요. 미치겠는데 서브를 치긴 쳐야 했고...팀원들에게 너무 미안했죠.”
욕심 많은 어린 아이는 그렇게 에이스로서의 책임감도 짊어졌다. 실력을 과시하는 직업이지만 동시에 겸손해야 했다. 사적 자아와 공적 자아가 충돌하는 틈바구니에서 한 때는 공황장애 증상도 생겼다. 그런 일상적인 우울감을 극복하기 위해 정지석이 마련한 해결법은 역시 힙합이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방 한 가운데서 MC몽의 ‘도망가자’, 창모의 ‘031576’ 등 슬픈 곡들을 연거푸 들으며 정지석은 수면 밑으로 침잠한다. 방전된 배터리에 다시 도전할 동력을 충전한다. “아무 이유 없이 우울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집 소파에서 노래를 들으며 3~4시간씩 앉아있어요. 우울감의 세계에 빠져서 정면으로 즐기는 거죠. 그러고 나면 떠있던 해가 져서 캄캄해지기도 해요.”
‘난 영원할 거라 믿어 / 흥분으로 가득 차’
“항상 겸손하고 책임감 있는 선수가 되겠습니다.” 지난 19일 시상식 가장 높은 곳에서 정지석이 외친 소감이다. 하지만 이날 인터뷰 도중 지나가던 최부식 코치가 “겸손하라”고 충고하자 “너무 숙이면 위에 못 봐요”라고, 당차게 말하기도 했다. 그게 정지석이다. 겸손은 미덕이지만, 자신이 온전히 이룬 성과에 대한 자신감을 숨길 필요는 없다. 정지석이 가진 꿈의 사이즈를 고려하면 더 그렇다. 최근 ‘무한재생’ 중이라는 창모의 ‘Meteor’ 가사처럼, 정지석은 그에게 부와 성공과 명예를 안겨준 배구판에 영원한 임팩트를 남기는 선수가 되고자 한다.
“(전)광인이형, (곽)승석이형, (서)재덕이형 등 특출난 장점이 있는 선수들이 많아요. 그 장점들을 다 갖고 싶어요. 그래서 당대 최고의 선수가 되고 싶어요. 나이가 들어도 ‘정지석 세대’, ‘정지석이 대한항공 왕조를 썼지’란 소리를 듣고 싶어요. 앞에 ‘최고’란 수식어가 최대한 많이 붙었으면 좋겠어요.”
‘이 도시에 나 외칠거야 / 드디어 내가 여기 왔다’
남자배구에서 해외리그로 직행한 사례는 없다. ‘해외 직행 1호 선수’가 되는 건 정지석의 또 다른 꿈이다. 통합 MVP지만 아직 26세다. 은퇴할 때까지 휴식기 없이, 더 큰 무대에 부딪쳐볼 시간이 충분하다. “남자배구에도 해외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연봉이 줄어들 수 있지만 좋은 리그에서 뛸 수만 있다면 상관없죠. 전 그냥, 배구가 재밌거든요.”
용인=이동환 기자 hu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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