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안구 기증을 서약한 고(故) 정진석 추기경의 각막이 연구에 활용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기 기증 동참 움직임이 활발해 질 것이란 기대 섞인 전망이 나오고 있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 선종 당시 각막 이식 사실이 알려져 장기 기증 서약자가 한해 20만명을 넘긴 것처럼 장기 이식 동참 행렬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 추기경이 선종한 지난 27일 서울성모병원에선 그의 생전 서약에 따라 안구 적출 수술이 진행됐다. 앞서 정 추기경은 장기 기증 서약서에 ‘내 주변의 모든 분께 감사합니다. 가능하다면 각막을 기증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적었다. 서울성모병원 관계자는 “고령인 정 추기경의 안구는 환자 이식에 적합하지 않아 연구에 활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 추기경은 서약 당시 ‘이식이 어렵다면 안구 질환 연구에라도 활용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관계자들은 정 추기경의 장기기증 소식이 이식을 기다리는 환자들을 비롯해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 관계자는 29일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2009년 2월부터 기증 서약자가 가파르게 늘어 그해 처음으로 20만명이 넘는 서약 신청이 이뤄졌다”며 “정 추기경 선종 이후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김 추기경은 1990년 “앞 못 보는 이에게 빛을 보여주고 싶다”며 안구 기증을 서약한 바 있다. 2009년 선종 후 김 추기경의 각막은 환자 2명에 이식됐다.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에 따르면 당시 김 추기경이 선종한 2월 한 달 동안 평소보다 20~30배 많은 인터넷 서약이 접수됐다.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 통계로는 김 추기경이 선종한 2월 8187명이었던 서약자가 3월 2만3091명, 4월 3만3219명, 5월 3만7207명으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2005년 이후 매해 10만명 선에 그쳤던 서약자 수는 그해 20만명을 넘었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 관계자는 “김 추기경 장기 기증 이후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특히 기증원은 이번 정 추기경의 장기기증 소식은 지난해 코로나19 여파로 서약자 수가 뚝 떨어진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장기 기증 서약자는 2013년 15만4798명을 기록한 이후 2018년(7만763명)까지 꾸준히 감소하다 2019년 9만350명으로 증가했다. 부모 동의 없이 장기 기증 서약이 가능한 나이가 만 19세에서 만 16세로 낮아진 것이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코로나19 탓에 지난해 서약자 수는 6만7161명으로 전년보다 약 26% 감소했다.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 관계자는 “코로나19로 대면 활동에 제약이 있어 홍보나 서약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단체들은 지금부터라도 정 추기경의 뜻을 실천하는 홍보에 매진할 것으로 보인다.
장기 기증 서약이 반짝 유행처럼 지나가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추기경 선종 이후에도 장기 기증 동참 움직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관계자들은 “장기 기증이 꼭 필요한 약속으로 인식되는 사회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장기 기증 상황은 매우 열악하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이식을 기다리다 숨진 환자는 하루 7명꼴이었다. 지난해 뇌사 장기기증자 수는 478명이었지만 장기이식 대기자는 4만명을 넘겼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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