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낙원의 밤’(박훈정 감독) 여자 주인공 재연(전여빈)의 등장은 누아르 장르의 전형을 배신한다. 재연은 ‘남성의 욕망’으로 점철된 암흑가의 피해자로서 같은 희생자 태구(엄태구)와 인간적으로 연대하며 그 세계를 무너뜨린다.
“정통 누아르의 변곡점이 되는 인물인 재연이를 놓칠 수 없었다.” 최근 화상 인터뷰로 만난 전여빈은 박훈정 감독의 한국형 누아르 신작 ‘낙원의 밤’을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재연은 누아르 장르의 일반 문법에서 벗어나 있다. 누아르 영화에서 살인은 하나의 죽음으로 조명받기보다 남성의 주체할 수 없는 복수심으로 소비된다. 유혈이 낭자해도 그들의 아픔을 세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낙원의 밤’에선 암흑가와 거리가 먼 재연에게 살인의 피해자라는 지위를 부여해 끌어들인다. 재연의 삼촌인 구토(이기영)가 러시아 무기 밀매상이라는 이유로 재연의 일가족이 살해당하면서다. 재연은 이때의 충격으로 시한부 삶을 살고 삼촌의 총으로 복수를 꿈꾼다.
재연의 캐릭터가 확장하는 건 조직에 쫓기는 암흑가 에이스 태구와 피해자로서 연대하면서다. 재연은 처음에는 제주도로 도망쳐 온 태구를 꺼리지만, 그의 누나와 조카가 암흑가의 욕망으로 인해 살해당한 것에 동질감을 느낀다. 이때 재연은 성욕과 치정의 대상으로 무심하게 소비되는 대신 온전한 한 사람으로 드러난다. 복수를 위해 총을 든 것 말고는 아무런 욕망도 없는 것 같던 재연은 태구 앞에서 물회를 흡입하고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린다.
전여빈은 두 주인공의 관계에 관해 “젊은 남녀의 사랑으로 보이는 게 극도로 꺼려졌다”며 “인간에 대한 사랑, 끈끈한 생애 끝의 연대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재연의 적당한 거리감은 그를 ‘낙원의 밤’에 흐르는 복수의 서사에서 중심에 서게 한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마지막 ‘복수 신’에서 재연의 복수는 태구를 위한 것도, 자신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죽음이 일종의 게임과 같이 소비되는 암흑가를 한 번에 전복시키는 충격을 선사한다. 전여빈은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며 “함부로 들뜨려 하지 않고, ‘불타고 있는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한 곳으로 에너지를 뿜어내자’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말했다.
마지막 순간으로 달려가는 과정 내내 기존 누아르 문법을 답습한 영화의 전개는 옥에 티라고 할 수 있다. 태구 가족의 죽음도, 그 죽음을 향한 복수도 작위적이라 느껴질 만큼 누아르 영화의 전형을 답습했다. 조직의 2인자 마 이사 역을 맡은 차승원은 살아있는 연기를 통해 ‘장르의 쾌감’을 제공하지만, 전형성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전여빈이 “극본에서는 재연이 잘 보이지 않았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