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감아’ 세월 보상하라” 한센인 가족들, 일본에 배상 청구

입력 2021-04-26 18:01 수정 2021-04-26 20:10
한센인 2세 등 가족피해자 62명의 한·일 변호인단이 26일 서울 서초구 변호사교육문화관에서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오른쪽 스크린에 등장한 한센가족 피해자 강선봉씨가 발언하고 있다. 소록도 병원에서 원격으로 참석한 강씨는 피해보상을 청구한 한센가족 피해자 중 ‘1호 청구자’로 이름을 올렸다. 연합뉴스


‘한센인 2세’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A씨는 직장에서 왕따가 됐다. 대기업에 근무하던 20대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차려진 빈소에 직원들이 문상을 오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A씨의 부모가 한센병이라는 걸 알게 된 직원들은 그때부터 A씨와의 식사자리를 꺼렸다. B씨는 부모님이 한센인이라는 걸 밝히지 않고 연애를 시작했다. 결혼까지 했지만, B씨가 한센인 2세임이 밝혀지자 남편은 곧장 이혼을 요구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9년 발표한 한센인 관련 실태조사에 담겨있는 한센인 자녀 피해 사례다. 일제강점기 한센인 격리 정책으로 차별 받은 건 한센인 당사자들만이 아니었다. 자녀들은 아직 감염되지 않은 아이라는 뜻인 ‘미감아’로 불렸고, 국가는 이들을 부모와 분리해 시설에서 키웠다. 1960~1970년대에도 한센인 2세들은 비한센인 학부모들의 반대로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각종 욕설과 모욕은 일상이었다.

한센인 가족들이 이러한 차별에 대한 보상을 일본정부에 청구했다. 한센인 2세 등 가족피해자 62명의 한·일 변호인단은 26일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19일 일본 후생노동성에 보상 청구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한국의 한센인 가족피해자들이 일본에 보상을 요청한 건 처음이다. 보상금은 자녀와 배우자의 경우 180만엔(약 1860만원), 형제·자매는 130만엔(약 1340만원)으로 정해졌다.

이번 청구는 1년여 전부터 시행된 일본 한센가족피해자보상법에 근거해 이뤄졌다. 2016년 일본의 한센 가족피해자들이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해 2019년 6월 원고 승소 판결이 나왔는데, 이 판결을 계기로 일본 국회에서 가족보상에 대한 법이 제정됐다. 이 법이 정한 보상 청구자 범위에는 한국과 대만 등의 일제강점기 당시 한센인 가족들도 포함됐다. 법의 전문에는 “국가와 정부가 회개와 반성의 뜻을 담는다”는 문장도 담겼다. 한센인 피해는 일제강점기 때 벌어진 과거사 문제 중 거의 유일하게 법적 해결방안이 마련된 사례라는 게 법조계 설명이다.

1호 청구자 강선봉(82)씨는 이날 소록도 병원에서 원격으로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한센인 부모를 둔 강씨도 어린 시절 부모와 격리돼 보육원에서 자랐다. 강씨는 “과거 아팠던 괴로움, 가족으로서 받은 설움을 일본에서 소송으로 풀어주고자 하는 변호사들에게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미 대만에서는 보상을 인정받은 사례가 나왔다. 현재까지 대만에서 6건이 청구됐는데, 지난 14일 첫 인정 사례가 나왔다고 일본 변호인단은 설명했다. 일본 변호인단의 오오츠키 노리코 변호사는 “한국에서도 가족 피해자들의 자료를 수집해서 2차, 3차 보상 청구를 이어나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가족소송을 진행했던 관계자는 “보상을 청구한 한국 피해자분들의 평균 나이가 81세”라며 “고령인 만큼 빨리 피해가 인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일본정부는 일제강점기 때 강제 격리됐던 국내 한센인 590명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 한국 법원도 한센인에게 강제 낙태수술을 강요한 국가 책임을 인정해 피해자 538명에게 1인당 3000만~4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