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거침없는 연기·직설적 유머로 세계를 사로잡다

입력 2021-04-26 16:32 수정 2021-04-26 16:48
2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이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배우 윤여정이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난 거침없는 연기로 아카데미상을 거머쥐었다. 한국 배우가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은 것은 한국 영화사 102년만에 처음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과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25일(현지시간)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윤여정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윤여정은 1980년대 한인 가족의 미국 정착기를 그린 영화 ‘미나리’에서 딸 모니카(한예리) 부부를 돕기 위해 한국에서 건너간 할머니 순자 역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쳐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날 여우조연상 후보에는 ‘보랏 서브시퀀트 무비필름’의 마리아 바칼로바, ‘힐빌리의 노래’의 글렌 클로즈, ‘맹크’의 어맨다 사이프리드, ‘더 파더’의 올리비아 콜맨 등 쟁쟁한 배우들이 올랐다.

‘미나리’의 제작사인 A24를 설립한 배우 브래드 피트가 수상자의 이름을 부르자 한예리와 나란히 앉아있던 윤여정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무대로 걸어나왔다.

윤여정은 무대에 서자마자 “감사합니다”라는 틀에 박힌 수상소감 대신 “브래드 피트를 드디어 만나게 돼 정말 반갑다. 우리가 영화를 찍을 때는 어디 있었느냐”고 질문하며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어 “내 이름은 윤여정인데 유럽 사람들은 ‘여영’이나 ‘유정’ 등으로 잘못 불렀다”면서 “하지만 지금까지 내 이름을 잘못 부른 여러분 모두 용서해드리겠다”면서 연속해서 분위기를 띄웠다.

윤여정은 ‘미나리’를 함께 만든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과 배우들에게 공을 돌렸다. 윤여정은 “스티븐 연, 한예리, 노엘 김 등 미나리 식구들에게 고맙다”면서 “무엇보다 정이삭 감독이 없었으면 나는 여기 없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의 선장이자 나의 감독이었다”고 말했다.

더불어 윤여정은 자신의 스크린 데뷔작인 ‘하녀’(1971년)를 연출한 고 김기용 감독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나의 첫 영화를 같이 한 첫 감독 김기영 감독에게 감사한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정말 수상을 기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여정은 영화 ‘하녀’로 제4회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바 있다.

‘미나리’에서 윤여정이 연기한 순자는 전형적인 이민자의 모습도, 전형적인 할머니의 모습도 거부했다. 고생하는 딸을 보면서 눈물짓는 대신 긍정적이고 유쾌한 태도로 집안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손주를 사랑하지만 응석을 받아주는 대신 짖궂은 장난을 쳤다. 쿠키를 구워주는 대신 화투를 가르쳤다.

외신들은 윤여정의 수상 소식을 전하며 ‘미나리의 신스틸러’라고 극찬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윤여정은 ‘미나리’의 교활한 신스틸러”라면서 “손주에게 장난을 치고 옛 풍습을 전해주거나 전쟁·빈곤에 대한 기억을 스며들게 하는 모습은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의 진정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수상소감에서 동갑내기 배우이자 함께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미국 배우 글렌 클로즈를 언급하며 자신을 낮춘 점도 화제가 됐다. 윤여정은 수상소감에서 “나는 사실 경쟁을 믿지는 않는다”면서 “그동안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글렌 클로즈와 내가 어떻게 경쟁하겠나. 우린 각자 영화에서 각자 다른 역할을 해 온 승자”라며 겸손함을 나타냈다.

윤여정을 ‘전설적인 여배우’라고 소개한 워싱턴포스트(WP)는 “윤여정은 40여년간 배우로 활동하면서 한국에서 많은 상을 받았지만 오스카 무대에서는 다소 자기 비하적(self-deprecating)일 수밖에 없었다”면서 “글렌 클로즈를 언급하며 ‘내가 더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CNN방송도 “윤여정은 글렌 클로즈에 대한 오랜 존경을 나타내며 ‘나는 경쟁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강조했다.

영국 가디언은 “윤여정은 이날 밤의 승리자였다”면서 “그는 브래드 피트에게 추파를 던지고 자신의 이름을 잘못 발음한 모든 사람들을 용서했으며, 글렌 클로즈를 이긴 것에 대해 진심으로 당황한 듯 보였다”고 보도했다.

윤여정은 이날 수상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최초의 한국 배우이자 영화 ‘사요나라’(1957)의 우메키 미요시 이후 64년 만에 역대 두 번째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아시아 배우가 됐다.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로 앞서 미국배우조합(SAG)상, 영국영화TV예술아카데미(BAFTA)상과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 여우조연상 등을 받았다.

‘미나리’는 여우조연상 외에도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음악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지명됐다. 그러나 작품상과 감독상은 ‘노메드랜드’, 각본상은 ‘프라미싱 영 우먼’, 남우주연상은 ‘더 파더’, 음악상은 ‘소울’이 각각 가져갔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