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영어 못한다”는 말을 달고 사는 윤여정이지만, 오스카에서 그가 입을 떼자 청중은 환호했다. 그가 30여 년 전 미국에서 배운 생존 영어에 솔직한 삶의 태도가 배어 나오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브래드 피트, 마침내 만나게 됐군요. 저희가 영화 찍을 땐 어디 계셨나요?” 윤여정이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수상자로 무대 앞에 오르면서 던진 첫 마디였다. “감사합니다”라는 뻔한 말로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솔직함’으로 자기의 캐릭터를 드러낸 시도였다. 영화 ‘미나리’의 제작자로 참여한 브래드 피트는 이날 윤여정과 처음 만났다.
윤여정 특유의 청중과의 ‘아이스 브레이킹’은 수상소감 내내 이어졌다. 그는 “내 이름은 여정 윤인데, 유럽 사람들은 ‘여영’이라거나 ‘유정’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모두 용서해드리겠다”고 하자 또 한 번 좌중을 폭소케 했다. 여기에 윤여정이 “정신 좀 차리겠다”는 추임새까지 덧붙이자 그의 한국식 발음이나 문법적 오류는 오히려 그의 캐릭터를 돋보이게 해주는 ‘무대 장치’로까지 비쳤다.
한국 배우 윤여정에 사람들이 호감을 느끼자, 뒤에 따라오는 겸손은 더이상 뻔한 말이 아니었다. “영화를 찍으면서 우리 모두 함께 가족이 됐다”며 제작진에 대한 사랑을, “아들들의 잔소리 덕분에 엄마가 열심히 일했다”로 가족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내가 어떻게 클랜 클로즈같은 대배우와 경쟁하겠나. 다른 역할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며 다른 배우들에 대한 존중도 담아냈다.
솔직함으로 권위를 뒤집으면서 겸손으로 자신을 채우는 윤여정의 화법은 앞선 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윤여정이 이때 수상 소감으로 ”콧대 높은(Snobbish) 영국인들이 인정했다는 점에서 더 큰 영광”이라는 표현을 쓰자, 해외영어 문화권 사람들은 ‘세비지 그랜마(Savage Granma: 거침없이 솔직한 할머니)’라며 열광했다.
앞서 한국의 20·30세대는 ‘윤며들다(윤여정에 스며들다)’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면서 윤여정에 열광했다. 윤여정은 이에 스브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비호감 1위였던 때도 있었는데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특유의 균형감각을 보였다. ‘적당한 거리두기’가 엿보이는 삶의 태도 덕분에 “60세가 돼도 인생은 몰라요. 나도 처음 살아보는 거니까. 나도 67살은 처음이야”(tvN ‘꽃보다 누나)라는 울림이 있는 말을 인생 후배들에게 건네기도 한다.
윤여정 특유의 균형 감각은 그의 삶이 비주류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조영남과의 결혼에 실패한 후 ‘이혼녀’라는 낙인으로 방송에 출연하는 데에 어려움 겪었다. 미국으로 떠났던 결혼 생활을 포함하면 10여 년의 공백이었다. 당시 이혼에 관한 국민 정서는 격했다. 절친한 친구인 김수현의 드라마들(‘어미’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이 윤여정을 구원했다. 윤여정은 그래서 그런지 “나는 배고파서 연기했는데 남들은 극찬하더라. 그래서 예술은 잔인한 거야”와 같은 말을 인터뷰에서 자주 되새겼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