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윤여정의 억척스런 삶

입력 2021-04-26 09:34 수정 2021-04-26 17:51
2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배우 윤여정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AFP 연합뉴스

영화 ‘미나리’ 속 순자(윤여정)의 대사처럼 미나리는 습기가 있고 약간 그늘진 곳이라면 어디서든 잘 자란다. 미나리는 해충의 피해에도 강하다. 고혈압과 간질환을 예방하고, 몸 속의 중금속을 배출해 해독작용을 돕는다. 된장이나 고추장으로 무침을 해먹거나 전을 부쳐먹어도 좋고, 밥이나 국 또는 탕에 곁들이는 재료로도 훌륭하다. 음식에 맛과 향을 더한다.

배우 윤여정의 삶은 미나리처럼 억척스러웠다. 1966년 열 아홉살의 어린 나이에 TBC 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그는 1971년 스크린 데뷔작인 고 김기영 감독의 작품 ‘화녀’에서 파격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제10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신인상, 제8회 청룡영화상에서는 여우주연상, 제4회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속편으로 제작된 영화 ‘충녀’도 흥행에 성공하면서 윤여정은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2년 후인 1974년 가수 조영남과 결혼하면서 그의 연기 인생엔 먹구름이 꼈다. 결혼과 동시에 윤여정은 배우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건너갔고,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결혼 생활 13년만에 맞은 파경은 그의 복귀에 걸림돌이 됐다. 이혼이 많지 않던 시대였다. ‘이혼녀’라서 TV에 나오면 안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달 초 미국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윤여정은 “그땐 ‘윤여정은 이혼녀야. TV에 나와선 안 돼’라고 했다. 근데 지금은 나를 아주 좋아해 준다”면서 “이상하지만 하지만 그게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윤여정은 드라마, 영화에 비중 있는 역할로 캐스팅되지 않았다. 한 때 톱스타였지만, 생계를 위해 단역과 조연 역할이라도 맡아야 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버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윤여정은 다시 일어섰다. 그늘에서 쌓은 연기력과 단단해진 마음은 연기에 맛과 향을 더했다. 비중은 적었지만 다양한 작품 경험은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다.

영화 '미나리'에서 순자 역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 윤여정. 판시네마 제공

윤여정이 다시 안정적인 연기 생활을 이어가게 된 데는 김수현 작가의 도움이 컸다. 그는 ‘사랑이 뭐길래’(1991년), ‘목욕탕집 남자들’(1995년) 등 김수현 작가의 인기 드라마에 꾸준히 캐스팅됐다.

2000년대 들어선 ‘바람난 가족’(2003년) ‘하녀’(2010년) ‘돈의 맛’(2012년) ‘고령화가족’(2013년) 등 영화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로 윤여정만의 ‘아우라’를 쌓아나갔다. ‘꽃보다 누나’ ‘윤식당’ 등 예능에서도 솔직하고 지적이면서 재치있는 캐릭터로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윤여정은 어디서나 존재감을 드러냈고, 그가 등장하면 대중은 유쾌하고 통쾌해졌다.

화려하지도 않고, 강해보이지도 않지만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미나리는 배우 윤여정의 삶 그 자체다. 파란만장한 연기인생 속에서 일흔을 넘긴 윤여정은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가 됐고, 전세계는 그를 주목하고 있다.

윤여정이 25일(현지시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타게 되면 ‘인도로 가는 길’(1984)의 페기 애슈크로프트(수상 당시 77세), ‘하비’(1950)의 조지핀 헐(수상 당시 74세)에 이어 세 번째로 나이가 많은 수상자가 된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