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내지 않고’ 정치를 얘기하는 방식

입력 2021-04-25 16:20 수정 2021-04-26 07:53

정치는 왜 맨날 싸우는가. 정치는 왜 그토록 무기력한가. 정치에 대한 열정은 왜 종종 위험한가. 그렇다면 정치는 왜 중요한가.

최근 출간된 책 ‘정치를 옹호함’(후마니타스)과 ‘파시스트 되는 법’(사월의책)은 이런 질문들에 답한다. 둘 다 작은 책이지만 정치에 대한 색다른 시선을 제시하며 통념을 돌아보게 한다. 정치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실망으로 들끓는 우리 사회에서 정치란 무엇인가를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자주 불려나올 것으로 보인다.

‘정치를 옹호함’…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영국 정치학자 버나드 크릭(1929∼2008년)은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오해와 편견을 교정하려는 목적으로 ‘정치를 옹호함’을 썼다. 1962년 처음 저술된 후 50년 넘게 읽히고 있다. 국내 번역은 이번이 처음이다.

번역자 이관후(경남연구원 연구원)씨는 “영국에서는 일반 가정집의 책장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책”이라며 “영국에서 정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한 권의 작은 책으로 답을 대신할 수 있다면 바로 이 책인 셈이다”라고 소개했다.

“대부분의 사회는 분열돼 있고, 정치란 분열된 사회를 과도한 폭력 없이 통치하는 방법이다.” 이 책의 핵심은 이 문장에 다 담겨 있다. 책은 이 주장을 다양한 측면에서 변주한다.

저자는 우선 정치가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술이라는 실용적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해 “정치는, 체계화된 국가가 단일한 종족, 종교, 이해관계 혹은 전통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구성된 집합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곳에서 나타난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를 특정 이념이나 세력을 대변하거나, 그들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태도야말로 그에겐 ‘반정치’가 된다. 그에게 정치에서 신조라는 게 있다면 유일하게 ‘조정’이 신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정치적 과정은 특정한 정치적 신조에 얽매이지 않는다. 진정한 정치적 신조는 오히려 조정이라는, 끝도 없고 어렵기 짝이 없는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해결책을 찾아내려는 시도다.”

그는 정치를 원칙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행위’로 규정한다. 그는 “정치란 행위다”라며 “부당한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은 채, 전통이나 자의적 통치에만 의존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할 정도로 성장한 공동체의 유지라는 인류학적 기능을 가진 사회학적 행위, 간단히 말해 행위로 간주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원칙이나 신조를 지키는 것은 적절한 수준이나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 정치는 “이상을 향한 아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경우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상을 위협할 수 있다.”

정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 조정의 절차로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정치를 포기하거나 파괴하는 것은, 다원주의와 다양성에 기반을 둔 문명사회에 질서를 부여하는 바로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정치는 우리가 무정부 상태나 단일한 진리를 추구하는 폭정에 고통받지 않고 다양성을 향유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파시스트가 되는 법’… 민주주의에 지친 사람들에게

정치에 환멸이 일고 민주주의에 피로를 느끼는가. 그렇다면 파시스트가 한 번 돼보자. 파시즘은 확실히 효율적이고 ‘사이다’ 같은 시원함을 준다.

이탈리아의 유명 소설가 미켈라 무르자(49)는 ‘파시스트 되는 법’에서 파시스트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명백히 반어적인 풍자라는 게 명백하지만 그가 연기하는 파시즘의 목소리는 사실 우리가 매일 주변에서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서늘하다.

파시스트는 민주주의적 ‘지도자’를 싫어한다. 그들은 ‘수령’에 끌린다. 사실 한 사람에 의한 통치는 장점이 많다. “국가를 운영하려면 행동에 결단력이 있고 추종자를 이끄는 데 주저함이 없는 인물, 어떤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장애물을 치우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우리가 주변에서 자주 듣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파시즘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모든 이견을 허용하는 민주주의는 구조적으로 파시즘에 취약하다. 파시스트인 이 책의 화자는 “민주주의 바보들은 우리를 단지 생각이 다른 상대로 믿고서, 선거전에 뛰어들어 표를 얻게 하고, 심지어 권력까지 쥐도록 놓아둘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말한다.

선거에서 파시즘이 승리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민주주의자들은 왜 파시스트에게 표를 줄까. “그들은 우리(파시스트)가 늘 여기에 있었고,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으며, 오랫동안 재정비를 해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모든 징후를 자발적으로 무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 국가에서는 파시스트를 비판하는 것마저 쉽지 않다. 그들이 “보셨습니까? 저 사람은 사실 민주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그는 반대 목소리를 잠재우려 합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면 “작은 기능적 결험 때문에 반민주적이라는 비난에 처한 민주 진영은 합선을 일으킬 것이며, 심지어 우리 입을 틀어막으려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파시스트라는 생각이 민주주의 지지자들에게 들기 시작할 것”이다.

파시즘의 논리는 여성 차별에도, 동성애자 비판에도, 구호 정책에도 스며들어 있다. 차별 정책을 정당화하면서 “사물을 자연의 질서 안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라고 주장한다거나, 차별적인 복지 정책을 지지하면서 “소외계층 일반이 아니라 ‘우리의’ 소외계층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게 그런 경우다.

저자는 “파시즘은 충분히 감시하지 않으면 어떤 그 무엇이든 오염시키고야 마는 놀라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정치의 혼란과 무기력, 민주주의의 피로감 속에 파시즘은 부활의 기회를 노린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