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년 간 삐걱거렸던 미국과 터키의 관계에 또다시 깊은 생채기가 남게 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06년 전 오스만제국 시절 자행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제노사이드(genocide)’로 공식 규정했다. 제노사이드는 국제법상 범죄임을 함축하는 표현으로, 역대 미국 행정부는 동맹 관계에 있는 터키를 고려해 사용을 자제했었다.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에 어긋나면 동맹이라도 배려하지 않는다는 뜻을 드러낸 셈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아르메니아인 학살 추모일 기념 성명에서 “우리는 매년 이날을 맞아 오스만 시절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로 숨진 사람들을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만행이 자행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해왔다”며 “우리는 메드 예게른(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지칭하는 아르메니아어 표현)의 희생자를 추모함으로써 당시 벌어졌던 참상이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학살에서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이 미국으로 이주해 정착한 역사를 언급하며 “우리는 그들의 사연을 존중하고 고통을 직시한다. 우리는 그 역사를 확인한다”며 “이는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 국민은 106년 전 오늘 시작된 제노사이드로 목숨을 잃은 모든 사람을 추모한다”며 제노사이드라는 표현을 재차 사용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오스만제국 시절인 1915년에 시작된 사건이다.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오스만제국과 러시아가 적대 상태로 돌입하자 오스만제국 내부에서 기독교도인 아르메니아인이 러시아와 내통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결국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학살과 강제이주가 자행되면서 약 150만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보다도 앞선 20세기 첫 제노사이드로 평가한다.
오스만제국의 후신인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에 격렬히 저항해왔다. 역대 미국 행정부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으로서 동맹국인 터키 입장을 감안해 제노사이드 대신 ‘학살’ ‘끔찍한 비극’ 등 완곡한 표현을 사용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1981년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유대인 학살, 캄보디아 학살을 묶어 제노사이드로 지칭했지만 예외적인 사례였다.
바이든 행정부가 입장을 바꾼 배경에는 미국이 그간 터키에 쌓아왔던 불만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터키는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러시아제 S-400 방공미사일을 도입했다가 F-35 스텔스 전투기 도입 취소 등 제재를 당했다. 시리아 등지에서 전개된 이슬람국가(IS) 소탕전에서도 미국과 엇박자를 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를 발표한 직후 시리아 내 쿠르드 지역을 침공해 미국을 당혹케 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지난 수년간 국무부와 국방부의 유럽 담당 관리들은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지 말라고 대통령에게 조언해왔다. 하지만 S-400 도입 등 최근 터키가 보인 노골적인 친러 행보에 미국 관리들은 격분했다고 한다. 워싱턴 근동정책연구소의 터키 전문가 소너 카갑타이는 “미국 국방부는 한때 터키를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부처였다”며 “지금은 그 정반대가 진실”이라고 설명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바이든 대통령의 선언은 인권을 대외정책의 중심축으로 삼겠다는 그의 공약을 반영하고 있다”며 “러시아나 이란 등 잠재 적국과 결탁할까봐 전략적 중요성이 있는 타국에 제대로 분노를 표출하지 못했던 전임 대통령들과 절연한 것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WP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입장을 전환함으로써 대외정책과 인권과 관련한 접근법을 손쉽게 재조정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터키 정부는 바이든 대통령 성명에 강하게 반발했다. 메블뤼트 차우쇼을루 터키 외교장관은 트위터에 “오로지 대중영합주의에 바탕을 둔 성명을 전적으로 배격한다”며 “우리는 우리 과거와 관련해 그 누구에게도 배울 게 없다. 정치적 기회주의야말로 평화와 정의에 대한 가장 큰 배신”이라고 비난했다. 세다트 오날 터키 외교차관은 데이비드 새터필드 터키 주재 미국 대사를 불러 항의했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