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도 몰라요. 아무것도 안 보이죠.”
빨간 지붕이 돋보이는 기와집 주변으로 연둣빛 새싹들이 넘실댄다. 녹색 잎이 돋아난 암벽 사이로 폭포수가 길게 떨어진다. 여러 꽃이 어우러져 피어난 산과 들에는 봄기운이 내려앉았다. 박환(63) 화가의 그림이다. 빛과 색이 살아있는 그의 그림은, 그러나 캄캄한 암흑 속에서 그려진 것이다.
박 화가는 2013년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현재는 빛조차 구분할 수 없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과거 촉망받는 화가였던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암흑뿐이다. 사고 이후 깊은 절망감에 빠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부단히 자신의 한계에 도전했다.
연필 대신 실과 핀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붓 대신 손끝으로 색을 입힌다. 시력을 잃어 햇볕을 느끼지 못하지만, 누구보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풍경을 그린다.
오로지 손끝의 감각만으로 그려 낸 그림으로 ‘희망’을 이야기하는 박 화가를 지난 10일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시작했다. 처음에는 동양화를 그렸다. 그 이후로는 서양화 물감과 썩은 나무 등을 사용해 새로운 방식으로 작업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출품해 입선한 적도 있다. 인사동과 코엑스에서 전시도 열었는데 반응이 좋았다. 시력을 잃기 전까지는 신나서 계속 그림을 그렸다.”
-상당히 큰 사고였다고.
“지금은 햇볕도 모른다. 두 눈 모두 완전히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2013년도 10월 30일, 교통사고였다. 처음에는 살아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사고 이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뭐 하려고 살아’라는 생각이 끝없이 밀려왔다.”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는.
“2014년도 8월쯤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족 도움을 받으며 작업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어떤 색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가족이 접시에다가 물감을 짜고 이야기해줬다. 그렇게 직접 그린 그림을 가족에게 보여주며 (무엇을 그린 것으로 보이느냐고) 물어봤다. 가족은 ‘이건 나무고 저건 바위로 보인다, 이 부분은 물을 그린 것 같다’고 대답했다. 가족이 내가 뭘 그린 건지 알아보자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작업 방식이 어떻게 되나.
“색을 입힐 부분에 핀과 실 등 재료로 표시를 한다. 이후 손으로 캔버스를 만지면서 위치를 파악하고 물감을 칠한다. 몇 년 전부터는 가족 도움 없이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물감 위치를 상자에 표시해 두고, 캔버스에도 핀을 꽂아서 위치를 표시한다. 그리고 손을 더듬어 색을 입힌다. 전에 무슨 색을 칠했는지, 어디에 어떤 색을 칠할지 다 외우고 있다. 보통 나무껍질, 청바지 조각, 무명실 등을 붙여 입체감 있는 그림을 그린다. (이런 방식으로 작업하면) 현실감과 생동감이 느껴진다. 또 나도 (캔버스에) 입체감이 있는 게 더 쉽고, 편하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텐데.
“조금이라도 보여야 작업을 할 텐데, 나는 오로지 감각으로 (작업을) 해야 했다. 종종 ‘여기까지인가 보다’ ‘불가능한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캔버스 앞에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한번은 나무를 붙이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옛날 같으면 30분이면 붙일 수 있는데 (사고 이후에는) 7시간을 들여도 안 붙었다. 종일 씨름하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도저히 못 하겠다고 (캔버스를) 치우려고 했다. 그런데 (자기 전) 붙여둔 나무 조각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다. 성공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포기하려다 한 번 더 해보고, 그게 성공하면 다시 마음먹고 작업했다. 그 과정이 힘든 건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았고 끝까지 노력했다.”
-현재도 작업 중인 것 같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길’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에는) 꽃길, 울퉁불퉁한 길 그리고 낭떠러지도 있다.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어려움도 있지 않나. 곧 다리도 그릴 예정인데, 다리는 사람들이 협동해서 만든 것이다. 이는 혼자서는 세상을 살 수 없다는 의미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른 이의) 도움을 받고 함께 살아간다.”
-어떤 방법으로 그림이 완성됐는지 파악하나.
“그저 몰두했던 작품에서 마음이 떠날 때가 그림의 완성이라고 생각한다. 물어볼 사람이 없다. 작업하다 보면 생각이 안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 감각적으로 됐다는 생각이 들고, 그림에서 손을 뗀다. 신경이 곤두서지 않으면 생각이 떠난다. 보이는 사람이라면 더할 수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 나로서는 이게 한계다. 대신 그림을 그릴 때 더 집중한다.”
-그림 작업할 때 주로 하는 생각이 있나.
“사실 어렵다. 아무것도 참고할 게 없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자연도 보고 다른 사람들 그림도 보면서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이제는 기억조차 다 사라졌다. 그래서 늘 기도를 한다. ‘무슨 그림을 그려야 할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으니 도와 달라’고 눈을 감고 빈다. 그러다 어느 날 무언가 떠오르면 손바닥에 (떠오른 이미지를) 그리면서 외운다.”
-시력을 잃기 전과 후 작품 세계가 달라졌나.
“완전히 180도 바뀌었다. 과거에는 나 자신만을 위해서 그림을 그렸다. 돈도 잘 벌고 유명해지길 바라며 애썼다. 그런데 지금은 누군가 내 작품을 보면서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그림을 통해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싶다.”
-박환 화가에게 그림이란.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싶다. 그래서 봄을 주로 그린다. 봄이 사계절 중에 제일 처음이고 시작이다. (봄이면) 잎이 연두색으로 나오기 시작하고 꽃도 핀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먼저 많은 사람이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또 누구나 살아가면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수 있다. 이렇듯 장담할 수 없는 삶이기 때문에 한 번쯤 주변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그 사람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고, 말 한마디라도 도와주고, 마음을 같이 해주면 좋을 것 같다. 우리 가족에게도 한마디 하고 싶다. 우리 가족은 나 때문에 힘이 많이 든다. 힘들지만 서로를 이해해주고 도와간다면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갈 것 같다.”
김아현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