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성수 금융위원장의 자진 사퇴를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10만명이 모였다. “암호화폐는 인정할 수 있는 화폐가 아니며 투자자 보호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그의 발언이 불씨가 돼 청원장으로 번진 지 단 하루 만이다.
분노의 시작은 지난 22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나온 은 위원장의 주장이다. 그는 2030 청년세대의 참여가 급증한 암호화폐 시장을 언급하며 “잘못된 길로 가면 어른들이 이야기를 해줘야 된다”고 말했다. 암호화폐를 내재가치가 없는 ‘인정할 수 없는 화폐’라고 규정하면서 오는 9월 무등록 거래소의 대거 폐쇄 가능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시장 과열에 따른 투자자 피해를 두고도 “가상 자산에 투자한 이들까지 정부에서 다 보호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암호화폐에 투자한 이들을 ‘투자자’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정부의 ‘투자자 보호’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어 “예컨대 그림을 사고팔 때 양도차익에 세금을 부과하지만 그림 투자까지 정부가 다 보호를 해야 하는 건 아니다”라며 “많은 사람이 투자하고 있다고 해서 관심을 갖고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하루에 20%씩 급등하는 자산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더 심한 투자를 부추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거래 규모에 비해 관련 법과 제도가 허술하다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지만 정부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투자자 손실을 당국이 책임지라는 게 아니라 투자자들이 관련 내용을 알 수 있게끔 규정을 만들어 줄 수는 없는 것’이냐는 물음에는 “하루 거래대금이 17조에 달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실체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며 “정부가 일관되게 말씀드리는 것은 이건 가상 자산이라는 것이고 (이 시장에)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재차 밝혔다.
2030 마음 잡기? 민주당 “꼰대식 발언” 비판
은 위원장의 발언에 정치권도 즉각 반응했다. 특히 4·7 재보궐선거 참패 이후 돌아선 젊은 층 민심 잡기에 집중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는 ‘꼰대식 발언’ ‘정신 차려라’ 등의 강한 비판이 나왔다.여권 잠룡으로 평가받는 이광재 의원은 23일 페이스북에 ‘암호화폐 정책,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는 제목의 글을 써 은 위원장의 발언이 부적절했음을 지적했다. 그는 2018년 암호화폐를 투기·도박이라고 보고 거래소 폐쇄를 목표로 했던 당시 박상기 법무부 장관을 소환하며 “그렇게 별다른 정책 없이 3년이 지난 지금 은 위원장은 암호화폐를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암호화폐 시장이 위험하니 막겠다는 접근은 시대착오적”이라며 “암호화폐는 이미 세계 경제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사라질 것이 아니고 폐쇄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청년들의 요구는 분명하다. 객관적 투자정보를 제공해주고 투명한 시스템을 만들어 건전하게 투자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라며 “불법행위를 차단하고 가격 조작이나 투자 사기 등 불법행위를 막아야 한다. 관련 제도를 정비하고 미래산업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의원은 공분을 산 은 위원장의 ‘어른들’ 발언을 겨냥한 듯 “왜 2030 세대가 암호화폐나 주식에 열광하는지 깊게 고민해야 한다. 그들의 삶이 불안하기 때문에 미래 가능성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라며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 어른들의 역할이다. 청년들의 미래투자를 기성세대가 막아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2030세대 초선’ 전용기 의원도 목소리를 더했다. 그는 같은 날 페이스북 글을 통해 “인정할 수 없으면 대체 왜 특금법으로 규제하고 세금을 매기는 건지 모르겠다”며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무책임한 태도가 공무원의 바른 자세인지도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기성세대의 잣대로 청년들의 의사결정을 비하하는 명백한 ‘꼰대’ 식 발언”이라며 “지금은 청년들이 평범하게 일자리를 구하고 월급을 모아 결혼하고 집사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런 입장을 이해하기 보단 질책의 목소리가 먼저 나온다. 그럼 청년들은 대체 무엇을 믿고 무엇에 기대야 하냐”며 “당국이 정말 어른인 척하고 싶으셨다면 맞니 틀리니 훈계할 것이 아니라 금융시장이 아니더라도 청년들이 돈을 벌고 살아갈 방법을 찾아내는 데 주력했어야 한다”고 분노했다. 마지막에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탁상공론에서 벗어나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무엇이 문제인가 확인부터 하시라”고 충고했다.
“배운 건 내로남불 뿐” 청원장서 터진 분노
2030의 분노는 결국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향했다. 은 위원장의 발언을 질타하는 관련 청원이 대거 등장했고 그중 23일 등장한 ‘은성수 금융위원장의 자진사퇴를 촉구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은 가장 많은 공감을 불렀다. 24일 오후 9시30분 기준 동의 수는 10만263명이다.
글쓴이는 “대한민국의 30대 평범한 직장인을 대표해 한마디 남겨보고자 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제가 4050 인생 선배들에게 배운 것은 ‘내로남불’이다. 아랫사람에게 가르치려는 태도로 나온 것이 대한민국을 망친 어른들의 공통점”이라며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 어른들이 가르쳐줘야 한다고 하셨다. 대한민국 청년들이 왜 이런 위치에 내몰리게 됐는지, 지금의 잘못된 길을 누가 만들었는지 생각해보시길 바라며 그 말에 책임지고 자진 사퇴하시라”고 격분했다.
그는 “4050 인생 선배들은 부동산이 상승하는 시대적 흐름을 타 노동 소득을 투자해 쉽게 자산을 축적해 왔다. 그들은 쉽사리 돈을 불렸지만 이제는 투기라며 2030에겐 기회조차 오지 못하게 각종 규제를 쏟아 낸다”며 “덕분에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집 하나 가질 수 없는 현실을 직면하게 됐다. 국민 생존이 달린 주택은 투기 대상으로 괜찮고 코인은 투기로 부적절하냐”고 반문했다.
이어 “은 위원장님께 묻겠다. 깡패도 자리를 보존해 준다는 명목하에 자릿세를 뜯어간다. 그런데 투자자는 보호해 줄 근거가 없다며 보호에는 발을 빼고 돈은 벌었으니 세금을 내라는 거냐”며 “불록체인과 코인 시장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는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미 선진국들은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각종 노력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제조업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냐. 훌륭한 인재와 IT 기술력을 갖추고도 정부의 이런 뒤처진 판단으로 세계적인 흐름에 지고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비난했다.
투기 열풍에 찬물… 비트코인 하락세
5000만원대까지 추락했던 암호화폐 비트코인 가격은 24일 오전 6000만원대로 반등했다. 이날 오전 9시 기준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 빗썸에서 1비트코인 가격은 6100만원이다. 앞서 전날 오후 5시쯤 5500만원대까지 떨어진 뒤 서서히 회복하는 흐름이다. 다른 거래소 업비트에서도 1비트코인은 6087만원으로 전날 최저가 5496만4000원보다 약 600만원 올랐다. 비트코인을 제외한 나머지 코인(알트코인)들도 대부분 소폭 반등했다.
미국 시장에서는 암호화폐 가격이 이틀째 약세를 보이고 있다. 세계 암호화폐 가격 동향 집계 사이트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23일 오후 3시30분(미 서부시간 기준·한국시간 24일 오전 7시 30분) 비트코인은 24시간 전보다 2.45% 낮은 5만605.30달러에 거래됐다. 시가총액도 1조달러 아래로 떨어지며 9430억6000여만달러가 됐다. 도지코인도 전날보다 11.85% 하락하며 0.24달러로 내려앉았다. 한때 500억달러를 넘어섰던 도지코인의 시총도 308억3000여만달러로 줄었다.
미 경제매체 CNBC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고소득층에 대한 자본이득세율을 2배 가까이 인상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가상화폐가 급락했다고 분석했다. 또 각국 정부와 금융 당국이 가상화폐를 단속할 것이라는 우려도 투기 열풍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고 봤다.
문지연 기자 jy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