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와 다른 ‘위안부’ 판결, 결정적 키워드는 ‘국가 면제원칙’

입력 2021-04-21 18:07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이용수 할머니가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선고가 끝난 뒤 청사를 나서고 있다. 권현구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배상책임을 놓고 엇갈린 판결이 나온 배경에는 국가 면제원칙 적용 범위에 대한 해석 차이가 있다. 1차 소송은 ‘반인권적 국제범죄’에 대한 국가 면제의 예외가 인정되면서 피해자 승소로 결론 났지만, 2차 소송에서는 예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본안 심리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부장판사 민성철)는 21일 2차 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 소송에서 각하 판결을 내리며 “재판부가 추상적 기준으로 국가 면제의 예외를 인정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국가 면제는 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를 소송 당사자로 삼아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관습법으로 위안부 피해자 소송의 핵심 쟁점으로 꼽혀왔다.

2차 소송을 심리한 재판부는 국가 면제의 예외 범위를 확대 해석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했다. 새로운 예외를 인정하려면 기본적으로 행정부와 입법부의 정책 결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현재 상황에서는 사법부가 불확실성을 초래하는 방식으로 결정을 내리긴 어렵다”고 판시했다.

반면 지난 1월 1차 소송에서는 ‘국가 면제가 배상의 회피수단이 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국가 면제의 예외가 인정됐었다. 일본이 위안부 동원이라는 반인권적 범죄로 국제법상 강행법규를 위반했기 때문에 국내 법원에서 소송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취지였다. 국제법 체계가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도 판단 근거로 제시됐다.

국가 면제의 적용으로 피해자들의 헌법상 권리가 침해되는지에 대해서도 두 재판부는 다른 판단을 내렸다. 1차 소송에서는 국가의 반인권적 범죄에 대한 국가 면제 적용은 헌법상 재판받을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란 논리가 작용했다. 반면 2차 소송 재판부는 국가 면제 원칙 자체와 이 사건에서의 원칙 적용을 헌법 위반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등 외교적 구제방안에 대한 해석도 엇갈렸다. 1차 소송을 심리한 재판부는 해당 합의가 구체적인 법적 권리·의무를 포함하지 않은 정치적 합의에 그쳤다고 봤다. 해당 판결문에는 “이 합의에 의해 원고(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맞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표현이 나온다.

반대로 2차 소송에서는 2015년 합의가 피해자들에 대한 대체적 권리구제수단으로 규정됐다. 정치적 합의의 성격이 있지만 엄연한 국가 간의 합의라는 점도 반영됐다. 재판부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아베 전 총리의 개인적 합의가 아닌 국가 간 합의”라며 “외교부는 이 합의가 일본과의 공식적인 합의이며, 재협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날 2차 소송 선고가 각하 취지로 전개되자 위안부 피해자 중 한 명인 이용수 할머니는 재판 도중 법정을 빠져나왔다. 이씨는 “숨을 쉬지 못하겠다. 너무 힘들다”며 울먹였다. 재판이 끝난 뒤 취재진 앞에 선 이 할머니는 “너무나 황당하다.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간다. 저는 이 말 밖에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가 대표인 ‘위안부’ 문제 ICJ 회부 추진위원회도 선고 이후 보도자료를 내고 “부당한 판결에도 불구하고 판결 항소 등 다음 수순을 고민 중”이라며 “유엔의 주요 사법기관인 ICJ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법적 판단을 받을 것을 거듭 제안한다”고 밝혔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