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법원이 21일 각하 판결을 내리면서 우리 정부도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됐다. 악화일로를 걷는 한·일 양국 관계를 외교적으로 뒤흔들 ‘사법부발 악재’가 추가되는 상황은 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원이 상반된 하급심 판결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정부의 셈법은 더욱 복잡해졌다.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과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로 모두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외교적인 해법을 도출하는 것도 쉽지 않아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번 판결은 지난 1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처음 인정한 법원 판결로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상황에서 나왔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해온 문재인 대통령도 당시 “곤혹스러운 게 사실”이라고 밝히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국가면제’를 인정하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외교적인 교섭’을 주문한 이날 판결로 정부도 일단 한시름 놓게 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10월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을 시작으로, 최악인 한·일 관계에 숨통을 틔울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외교부는 대변인 논평을 통해 “정부는 피해자중심주의 원칙에 따라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을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 나갈 것”이라며 “일본 정부가 1993년 고노담화 및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등에서 스스로 표명했던 책임 통감과 사죄, 반성의 정신에 부합하는 행보를 보일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위안부 문제를 두고 서로 다른 판결이 나오면서 정부의 셈법이 오히려 복잡해졌다는 관측도 나온다. 결국 대법원이 상반된 하급심 판결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본을 상대할 논리를 마련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일본이 이번 판결을 이용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사죄·반성 요구를 반박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아울러 일본은 ‘위안부 문제는 두 차례 한·일 간 합의를 통해 이미 해결됐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어 정부의 외교적인 부담만 커졌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관훈클럽토론회에서 “일본은 정부 간 합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어불성설’ 같은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며 “마치 한국은 국제법을 위반한 나라로 계속 여기저기 다니면서 우리를 매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일 당시 비공개로 여러차례 방일해 위안부 문제 관련 해결 방안을 제시했으나 일본은 항상 더 나은 안을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이번 판결로 위안부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계기가 마련된 것 같다”면서도 “일본이 미온적이라 태도를 보이고 있어 문제 해결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손재호 기자 say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