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럽게 얻어진 정의가 이곳 공동체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평결은 이 나라와 세계에 중대한 함의를 갖습니다.”
지난해 5월 흑인 청년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짓눌러 숨지게 한 전직 경찰관 데릭 쇼빈에게 20일(현지시간) 배심원 만장일치 유죄 평결이 내려지자 유족 측 변호인은 이 같은 환영 성명을 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유족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가 세상을 바꿀 거야’라고 했던 플로이드의 딸 지아나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지금 그 변화를 시작하려 한다”고 위로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유명인사들도 이번 평결을 높게 평가한다는 입장을 연이어 발표했다. “현대 미국 인종주의에 대한 가장 폭발적 시련 중 하나”(뉴욕타임스·NYT)로 평가받는 이번 사건이 전 세계에 던진 메시지가 커다란 파문을 낳고 있다는 의미다.
현대 미국 인종차별 철폐 운동의 새 이정표
NYT는 “지난 11개월 동안 터져 나온 인종적 정의에 대한 외침이 미국인의 삶 거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1960년대 시민권 운동 이후 한 번도 이뤄지지 않은 규모”라고 분석했다.
쇼빈은 지난해 5월 25일 20달러짜리 위조지폐를 사용한 혐의로 플로이드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그의 목을 무릎으로 9분 29초간 짓눌러 숨지게 했다. 플로이드는 “숨을 쉴 수 없다”고 호소했지만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쇼빈이 그를 제압하는 장면은 주변 행인들이 직접 목격했고, 관련 영상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돼 즉각적인 파장을 낳았다.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는 해시태그를 담은 인종차별 항의 운동이 시작됐고, 다른 나라에서도 동조 시위를 촉발했다.
항의 운동은 구체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여러 치안 개혁법이 주차원에서 도입됐다. NYT는 30개 주 이상이 경찰 감독 및 개혁법을 통과시켰다고 분석했다. 대부분 경찰의 무력 사용 제한, 징계 시스템 점검, 민간 감독 강화 등의 내용이 담겼다. 기업들도 인종적 평등을 위해 수십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했고, 내셔널풋볼리그(NFL)는 흑인 선수들의 경찰 폭력에 대한 시위를 지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분열과 인종 불평등 문제 경종
대선이 다가오면서 반대 움직임이 시작됐다. 일부 강경 시위를 문제 삼아 플로이드 사건의 의미를 폄훼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들을 ‘폭도’로 규정하며 강경 진압에 나서 미국 사회가 극단적 분열 상황으로 치달았다. 미국 언론들은 지난해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승리는 인종차별에 대한 반감이 상당 부분 작용한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미국 사회가 이번 판결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 것은 차별에 기인한 미국사회의 분열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우려감이 깔려 있다. 로이터 통신은 “문제투성이의 미국 인종차별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이자 공권력의 흑인 처우에 대한 질책”이라고 평가했다.
플로이드 사건 재판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과 맞물려 진행되며 불평등 문제도 자극했다. NYT는 “이번 재판은 코로나19 전염병이 퍼져나가는 상황에서 진행됐고, 이는 국가 내의 인종 불평등에 관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유색인종은 바이러스와 그에 따른 경제적 혼란에 더 큰 타격을 입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적어도 비공화주의 백인 미국인들 사이에서 인종 불평등에 대한 인식과 개혁 지원에 대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미국 사회가 안은 숙제
이번 사건은 여전히 미국 사회에 여러 숙제를 남기고 있다. NYT는 “경찰에 의한 흑인 남성 살해가 얼마나 가차 없이 계속되고 있는지는 최근 발생한 단테 라이트 총살 사건을 보면, 흑인 미국인들에게 진정한 변화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반발 조짐도 문제다. 조지아주처럼 공화당이 이끄는 지역에서는 투표권을 줄이고 경찰을 보호하며 대중 시위를 효과적으로 범죄화하는 법안이 속속 발의되고 있다.
비영리 시민단체 ‘컬러오브체인지’ 라사드 로빈슨 대표는 “플로이드의 죽음 이후 변화가 얼마나 지속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플로이드에게 인정되지 않았던 정의가 모든 미국인에게 보장되도록 하는데 전념하는 모들 이들과 연대한다. 진정한 정의는 평결 이상이어야 한다”며 미국 사법 시스템 개혁을 촉구했다.
각계가 보낸 지지
이번 판결에 대한 환영 메시지는 야당인 공화당에서도 나왔고, 해외에서까지 이어졌다. 공화당 팀 스콧 상원의원은 “이번 결과가 우리 사법 시스템의 진실성에 대한 새로운 확신을 심어줬지만 아직 할 일이 더 많다”고 밝혔다. 공화당 소속 래리 호건 메릴랜드 주지사는 “이제야 정의가 구현됐다. 이번 평결이 공동체에 평화를 가져다주길 소망한다”고 했다.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평결문이 낭독될 때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세계가 목격한 것을 인정해준 모든 배심원에게 감사드린다”고 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도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고 오늘 평결을 환영한다”며 “플로이드 가족과 친구들에게 위로를 보낸다”고 입장을 밝혔다.
전웅빈 기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