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길을 돌고 돌아서 가는데도 쫓아오더라고요. 파출소 앞에서는 창문을 내리고 절 보면서 경적을 울렸어요.”
한 여성이 지난달 24일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글이다. 그는 이날 오후 전북 강천사 휴게소에서 마주친 남성이 광주 서구 풍암파출소까지 무려 46㎞를 따라왔다고 주장했다. 이 여성이 공개한 차량 블랙박스 영상에는 한 남성의 끈질긴 추격이 담겼다. 남성은 사고 위험이 있는데도 무리한 끼어들기를 감행하며 줄곧 여성의 차량 뒤에 붙어 주행했다.
여성은 사건 당일 파출소에서도, 일주일 후 찾아간 경찰서에서도 ‘마땅히 적용할 법규가 없다’는 말만 반복적으로 들었다고 했다. 단순히 쫓아온 행위만으로는 처벌이 어렵다는 것이다. 네티즌의 비난이 거세지자 경찰은 남성을 경범죄 처벌법상 불안감 조성 혐의 등으로 입건했다.
한편에서는 법체계의 문제인데 경찰만 비난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마침 지난달 국회를 통과한 ‘스토킹 범죄 처벌법’이 올 가을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렇다면 사건이 9월 이후 벌어졌다면 상황은 달랐을까. 전문가는 남성의 행위가 ‘이 여성’을 대상으로만 행해졌고, ‘1회’에 그쳤다면 스토킹 처벌법 적용이 어렵다고 했다. 이 법에서 규정하는 스토킹 행위는 지속적, 반복적으로 이뤄져야 인정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1일 국민일보에 “남성이 불특정 다수의 여성을 쫓아다닌 거로 확인되면 (스토킹 처벌법으로도) 처벌할 수 있다”고 밝혔다.
“피해자 또 있으면 처벌 가능…CCTV 확인해야”
이 교수는 스토킹 처벌법에서 말하는 지속성과 반복성의 조건이 피해자가 한 명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한 피해자에 대한 가해는 1회에 그치더라도, 그 가해자가 그 외 다수의 여성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이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스토킹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일반적으로 이런 사건은 이 여성만 쫓아다닌 게 아니라 또 다른 피해자가 있을 수 있다”며 “‘신림동 사건’도 한 가해자가 여러 여성을 쫓아다닌 것 아닌가. 신림동에 스토커가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찰이 의지를 가지면 수사는 할 수 있다. 고속도로나 휴게소 CCTV를 다 열어봐서 그 남성이 다른 여성도 쫓아다녔다는 증거를 확보하면 된다”고 했다. 이어 “한 명만 1회로 따라다녔다고 하면 용의자가 ‘행선지가 같았다’고 변명할 수 있고, 용의자의 진술을 번복할 증거도 없을 수 있다”며 “다른 여성을 쫓아다니는 영상이 있으면 입증이 쉬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고속도로 스토킹 남성은 “가는 길이 겹쳤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경찰의 대처가 아쉽다는 네티즌 반응에 대해 “범죄는 법에 기반해 수사해야 하는데 아직 법이 없지 않나”라며 “그러다 보니 경찰 입장에서 수사를 안 해도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스토킹 처벌법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9월부터 스토킹 신고가 접수됐을 시 경찰이 의무적으로 CCTV를 열어봐야 한다는 거다. 안 하면 직무유기”라며 “지금은 경범죄로 입건하는 게 최선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정 통해 보완돼야…반의사불벌 조항은 한계”
일부 여성단체는 지난달 스토킹 처벌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후 “피해자는 단 한 번의 행위로도 공포나 불안을 느낄 수 있다”며 “실효성이 없는 법안”이라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이와 관련, “지금 통과된 법률은 22년 만에 드디어 ‘스토킹도 범죄구나’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기 위한 시작 지점”이라며 “피해자 보호를 위해 더 많은 게 필요하면 앞으로 개정을 통해 보완하면 된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4월 미성년자 의제강간죄 기준연령이 기존 13세에서 16세 미만으로 상향된 것을 예로 들었다. 이 교수는 “디지털 성착취라는 게 나오고 보니 10대들이 성착취 범죄에 쉽게 노출된다는 데 사회적 공감대가 생기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기준연령을 변경한 것 아닌가”라며 “모든 특례법은 개정돼왔다. 따라다니며 꽃을 주는 것을 구애 행위 정도로 생각하는 문화가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에서 지금은 출발선에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일부 여성단체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정말 심각할 때가 많다. 흉기 위협이나 살해로까지 이어진다”면서 “그런 사건들은 1회라도 정말 위험하기 때문에 여성계의 우려가 합당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스토킹 처벌법에서 가장 보완돼야 할 점으로 꼽히는 반의사불벌 관련 문구도 언급했다. 스토킹 처벌법은 스토킹 행위를 규정하면서 ‘피해자 의사에 반하여’라는 문구를 명시하고 있다. 여성계는 이 부분이 반의사불벌죄로 간주돼 피해자의 부담을 가중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교수도 “스토킹은 꽃을 들고 쫓아다니는 사람부터 이혼소송 중에 흉기로 살해하는 사건까지 범위가 굉장히 넓은 범죄”라며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며 합의를 강요할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이 교수는 “20년간 안 되던 게 이제 입법됐다. 첫 단추를 끼웠다”라며 “아쉬운 점은 21대 국회가 아니라 20대 국회에서 통과됐다면 ‘노원구 세 모녀’는 살해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사건도 큰딸이 3개월 동안 스토킹을 당했는데 경찰에서 수사를 안 해주니까 신고를 못 한 것 아니냐”라며 안타까워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