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형 국립외교원장 “한·미 동맹은 ‘가스라이팅’과 닮아”

입력 2021-03-30 16:39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이 30일 '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창비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이 한·미 관계가 신화화됐다며 보다 실용적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한·미 동맹을 ‘가스라이팅(Gaslighting)’에 비유하고, 한국이 “동맹에 중독되어왔다”는 평가도 했다.

김 원장은 30일 새 책 ‘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 출간 기념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한·미 동맹은 좋은 자산이라면서도 현재 양국 관계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판단을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밝혔다. 책 제목에 ‘역설’이라는 단어를 쓴 것도 두 나라의 관계가 그만큼 한쪽으로 쏠려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빛과 그림자, 찬반론 같은 단어도 있지만 역설이라는 단어를 쓴 건 앞의 단어가 50대 50의 느낌을 준다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우리에게 한·미 동맹은 매우 압도적으로 쏠려 있어서 동맹 수정, 유연화 같은 이야기만 해도 반미 또는 자주파라는 이념적 굴레를 쓰는 것 같다”고 부연했다.

책은 ‘새로 읽는 한미관계사’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현재에 이르는 양국의 역사를 18개의 주제로 나눠 정리했다. 분단과 한국전쟁, 1965년 한·일기본조약, 베트남전 파병, 5·18민주화운동, 제1차 북핵위기,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등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서부터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까지 현 정부의 대외 관계를 통해 한·미 관계를 조명했다.

김 원장은 특히 책에서 한·미 동맹이 ‘가스라이팅’과 닮아있고, 한국은 동맹에 중독되어있다고 지적했다. “70년의 긴 시간 동안 한미동맹은 신화가 되었고, 한국은 동맹에 중독되어왔다. 이는 우리가 처한 분단구조와 열악한 대외 환경 아래서의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상대에 의한 가스라이팅 현상과 닮아있다.”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히 조작해 스스로 인식이나 판단을 의심하게 해 통제와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차관급으로 현직에 있으면서 한·미 관계를 ‘가스라이팅’에 비유한 것에 대한 논란을 의식한 듯 해당 용어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보수학자가 먼저 사용한 것이라고 전제했다. 맥락을 봐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김 원장은 “책에도 썼지만 일부 보수학자가 북한이 우리를 가스라이팅한다는 주장을 하는데 가스라이팅은 압도적 존재가 상식적, 합리적, 자율적 결정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며 “우리보다 40배 못 살고 약한 북한이 도발한다고 가스라이팅이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미국이 조직적으로 가스라이팅을 하고 우리를 허수아비로 만든다고 보지 않는다”며 “호혜적 동맹이라면 안 할 말은 있어도 못 할 말은 없어야 하는데 그간 못 할 말이 많았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동맹 중독’이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서도 한국과 미국은 다른 나라로 서로의 이익이 완전히 동일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두 나라가 중국을 바라보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고, 북한에 대해서도 비핵화에는 동의하지만 방법이 일치하지 않기도 한다”며 “이 차이 자체를 너무 불안해 하는 것은 중독에 따른 금단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쿼드(Quad)’에 따른 한·미 관계 재정립과 관련한 질문에 대해선 “(쿼드가) 어디로 갈지 모르고, 내부적 이해관계가 있는데 참여해야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보고 중국을 겨냥한 군사동맹으로 가는 경우엔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에도 지속되는 미·중의 갈등은 쉽사리 판가름 나지 않을 거라는 전망도 했다. 김 원장은 “누가 이기는지 판가름 나지 않고 20~30년 우리를 괴롭힐 변수”라며 “미국이 확실히 제압을 못하고, 중국도 확실히 추월을 못해 긴장관계가 계속되면서 동북아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미 관계와 관련해선 ‘비밀협정’으로 돌파구를 마련해야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김 원장은 “현재 각국의 내부 정치 지형은 외교를 하면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매우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트럼프 방식으로 하면 너무 위험해서 바로 협상을 중단시킬 수 있어서 커튼 뒤로 가서 비공개로 회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