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럴림픽 2관왕 도전하는 보치아 정호원 “일본 땅에서 애국가 울릴 것”

입력 2021-03-30 13:40 수정 2021-03-30 14:09
정호원이 29일 강원도 속초의 속초종합운동장 내 보치아 훈련장에서 마우스 포인트를 입에 물고 홈틀에 놓인 빨간 공을 투구하기 위해 집중하고 있다. 속초=이동환 기자

29일 강원도 속초종합운동장.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인 탓에 다소 부산한 훈련장 환경 속에서도 투구구역에서 위치한 정호원(34·강원도장애인체육회)의 집중력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얀색 표적구까지의 각도와 거리를 숨죽이고 지켜본 그는 이윽고 옆에 있던 이문영(36) 감독에게 “3번이요”를 외쳤다. 이 감독이 해당 위치에 홈통(공을 굴릴 수 있게 만들어진 기구)을 설치할 동안 정호원은 철제 안테나에 셔틀콕의 코르크 부분을 붙여 만든 마우스 포인트를 입에 물었다. 전동휠체어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몸을 튼 그가 홈통 위에 놓인 공을 마우스 포인트로 톡 건드리자 데굴데굴 구른 빨간 공은 표적구 바로 옆에 정확히 안착했다.

이 종목은 이름도 생소한 ‘보치아’. 뇌성마비를 비롯한 중증장애인들이 즐기는 스포츠로, 패럴림픽 정식 종목 중에서도 올림픽 종목에서 유래하지 않은 독자적인 종목 중 하나다. 맞상대하는 두 팀 선수가 번갈아 공을 투척한 뒤 표적구로부터 가까운 공의 점수를 합해 1게임 4엔드 경기로 승패를 결정짓는다. 정호원은 그 중에서도 팔을 움직이기 힘든 선수들이 나서는 세부종목인 ‘BC3’ 선수다. 정호원은 훈련 뒤 국민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보치아는 중증장애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 종목”이라며 “조금이라도 알고 보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경기 끝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정말 다이나믹한 경기”라고 설명했다.

국내대회에 출전해 경기에 집중 중인 정호원(오른쪽)과 이문영 감독의 모습. 이문영 감독 제공

2018 인도네시아 아시안 패러 게임에서 보치아 종목 금메달을 따낸 뒤 포즈를 취한 정호원(앞줄 가운데)의 모습. 이문영 감독 제공

정호원은 생후 100일 무렵 뇌성마비 1급 장애를 얻게 됐다. 어머니가 잠시 물건을 사러 나갔다 온 사이 침대에서 떨어지면서 뇌에 충격을 받은 탓이다. 혼자 밥을 먹을 수도 없을 정도로 거동이 불편해 활동보조사가 옆에 붙어 식사 등을 챙겨줘야 한다. 그런 그가 보치아를 접한 건 충주 숭덕학교에 재학 중이던 1998년 중1 무렵. 체육 선생님의 권유로 시작한 보치아는 그의 삶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체육시간에도 전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맨날 뒤에서 책만 보고 있었죠. 보치아를 처음 한 날, 공이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게 너무 기뻤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보치아 한 번 해볼래’라고 권유해주신 그 선생님이 은인이죠.”

보치아에서 정호원은 승승장구했다. 입문 4년 만인 2002년 태극마크를 달았고, 2009년부터 2016년까지는 세계랭킹 1위를 고수했다. 이문영 감독은 “보치아는 경기장마다 바닥이 고르지 않은데 정호원 선수는 어느 경기장에서든 이를 빠르게 캐치한다”며 “중요한 순간에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도 강점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1988년 서울패럴림픽 때 도입됐지만 선수 풀이나 지원은 열악했던 보치아에서 한국이 세계적인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건 이런 정호원의 활약 덕이었다. 2008 베이징 페어(단체전) 금, 2012 런던 개인전 은, 2016 리우 개인전 금·페어 은 등 출전한 3번의 패럴림픽에서도 정호원은 항상 메달을 목에 걸었다.

정호원이 29일 강원도 속초의 속초종합운동장 내 보치아 훈련장에서 마우스 포인트를 입에 물고 홈틀에 놓인 빨간 공을 투구하기 위해 집중하고 있다. 속초=이동환 기자

다만 리우패럴림픽 이후 우여곡절이 많았다. 메달을 딴 뒤 받은 포상금(9000만원) 탓에 기초생활수급권이 박탈돼서다. ‘국위선양’을 했을 뿐인데 매달 70여만원의 수급비와 의료비 지원·주거 혜택 등 장애인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사라졌다. 이 문제가 보도되면서 사회적으로 ‘반짝 관심’을 받았지만 그 때 뿐이었다. 보치아는 비인기종목 중에서도 비인기종목이었기 때문이다. 정호원은 “대회가 끝나고 허무함이 컸다. 메달을 따도 아직 ‘보치아가 뭐예요’ 물어보는 분들도 많다”며 “장애인 경기밖에 없는 비인기종목이지만 많이 성원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행히 강원도에 보치아 실업팀이 생기면서 정호원은 생계 걱정을 놓고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이지만 이마저도 일부를 매 학기 모교의 후배 선수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쓰는 그다. 장애인으로서 생계와 운동을 병행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어서다.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돼 저는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제 제가 도움 받은 만큼 후배들을 도와야죠.”

정호원이 29일 강원도 속초의 속초종합운동장 내 보치아 훈련장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 중 미소짓고 있다. 속초=이동환 기자

정호원은 도쿄에서 숙원인 2관왕(개인·페어)에 도전한다. 리우 이후 고질적인 허리 부상 탓에 1년을 재활치료로 보낸 그의 세계랭킹은 3위까지 떨어졌다. 그 사이 오랜 2인자였던 그레고리오스 폴리크로니디스(그리스)가 1위로 올라섰고, 이웃나라 일본에선 카와모토 케이스케(18위)라는 ‘신성’이 과감한 플레이를 앞세워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두 선수는 근이영양증이나 경추장애를 갖고 있어 뇌성마비 선수들보다 조준할 때 신체의 떨림이 덜해 좀 더 안정적이다. 게다가 도쿄패럴림픽엔 해외 관중은 물론이고 장애인 선수 지원 인력의 입국까지 제한돼 그런 불이익이 없는 일본 선수들의 선전도 예상된다.

코로나19도 악재다. 장애인 선수들은 기저질환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 코로나19에 더 취약하다. 이 때문에 대한장애인체육회 차원에서 선수들의 외출이나 훈련을 자제시키고 있고, 1년 동안 국내대회도 모두 취소됐다. 기흉성 폐질환을 앓고 있는 정호원도 자택에서 영상 분석이나 코어 근육을 단련하는 홈트레이닝을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정호원은 “훈련을 못해 불안하기도 하고 정신적으로 힘든 점이 많았다”고 했다.

가족과 같은 주변 사람들의 존재는 그 시기를 버텨낸 힘이었다. 이 감독은 물론이고 정호원이 ‘속초의 엄마’라고 부르는 활동보조사 정순득(55)씨도 10년 간 마치 한 몸처럼 옆에서 정호원을 챙겼다. 정씨는 “큰 대회에 나가면 예민해지고 밥 먹을 시간도 없어 살이 너무 빠지는 게 걱정이지만, 나라를 대표해 패럴림픽에 나가는 선수를 케어한다는 것 자체가 뿌듯하다”며 “가족처럼 화목한 분위기로 웃으며 함께할 수 있어 힘든 점은 없다”고 했다. 정호원도 “두 분 모두 저에겐 없어선 안 될 존재라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화답했다.

정호원(가운데)이 29일 강원도 속초의 속초종합운동장 내 보치아 훈련장에서 이문영 감독(오른쪽), 정순득씨와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속초=이동환 기자

다음달 12일부터는 이천훈련원에서 국가대표 합숙훈련이 시작된다. 김한수(경기도청), 최예진(충남도청) 등 단체전에 출전하는 선수들도 소집돼 함께 본격적으로 메달 획득을 위한 담금질에 들어간다. 빡빡한 일정 탓에 대회가 끝나고 각종 질병이 악화되기도 했고, 이번엔 코로나19 감염 위험성까지 있지만 정호원은 비장하다.

“패럴림픽은 보치아를 알릴 수 있는 기회라 저에겐 의미가 커요. 일본 땅에서 태극기가 가장 높이 올라가며 애국가가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있어요. 무엇보다 좋은 결과를 얻어서 코로나19로 힘든 국민들께 조금이나마 감동을 드리고 싶습니다.”

속초=이동환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