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왜곡 ‘조선구마사’·성희롱 ‘헤이나래’ 폐지 사태가 남긴 것

입력 2021-03-26 12:54 수정 2021-03-26 13:30
SBS 조선구마사(왼쪽), 웹예능 헤이나래. 화면 캡처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와 웹예능 ‘헤이나래’가 역사 왜곡과 성희롱 문제 부딪혀 불명예 폐지됐다. 매체와 시청자 간 쌍방향 소통 가능해져 콘텐츠들이 대중의 엄격한 심판대에 오르고 있지만, 여전히 제작진이 대중의 감수성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SBS는 26일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해 조선구마사 방영권 구매 계약을 해지하고 방송을 취소하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방영권료 대부분을 이미 선지급했고, 제작사는 80% 촬영을 마친 상황이지만 지상파 방송사의 책임을 지기로 했다.

문제는 동북공정으로 국내 반중 정서가 극에 달했을 때, 중국 문화를 부각하고, 한국 역사를 왜곡했다는 점이다. 더 예민해야 할 시기에 시청자를 기만하고 중국 진출을 염두에 둔 행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조선구마사의 방송 내용 중에는 중국식 소품이 상당했다. 충녕대군(세종)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에 중국풍 등불과 중국식 음식이 널려 있었다. 현재 중국은 김치, 한복, 판소리 등을 모두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어 또 다른 빌미를 제공했다는 지적이 빗발쳤다.

태종 이방원이 무고한 백성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장면 등도 역사를 폄훼했다는 논란에 부딪혔다. 이 드라마의 작가는 앞서 똑같은 논란을 빚은 tvN ‘철인왕후’의 박계옥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지라시’로 표현해 몸살을 앓았으면서도 자성하지 않았다는 점에 시청자는 더 분노했다. 이후 제작에 투자한 삼성전자, CJ제일제당, LG생활건강, 에이스침대, 바디프렌드, 하이트진로 등 30곳이 넘는 기업들은 불매 운동을 우려해 일제히 손을 뗐고 방송 편성에 차질이 일었다.

전날 방송인 박나래가 출연하는 웹예능 헤이나래도 폐지됐다. 남자 인형의 옷을 갈아입히면서 수위가 높은 행동을 해 성희롱이라는 비난이 이어졌다. 제작진은 “무리한 욕심이 많은 분에게 불편함을 끼친 것에 대해 잘못을 통감한다”며 “이에 책임을 지고자 폐지를 결정했다”고 전했다. 박나래도 자필 편지에서 “부적절한 영상으로 불편함을 끼친 것 죄송하다”며 “공인으로서 한 방송을 책임지며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책임과 의무였는데 미숙한 대처능력으로 실망감을 안겨 죄송하다”고 했다.

방송가는 이번 두 프로그램 폐지 사태가 대표적 악례이면서 동시에 전환점 될 것이라 보고 있다. 한 관계자는 “콘텐츠 범람 시대에 시청자 눈높이와 감수성은 계속 높아지고 있어 소재와 표현의 적정성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며 “이번 사태로 깊게 생각해보게 될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사실 이전에는 판타지는 예술적 허용 범위가 넓다는 생각을 했고, 웹예능은 하위 문화로 취급돼 수위를 더 높이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모든 콘텐츠가 주류가 돼서 더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인터넷이 몽둥이 돼… ‘과잉 비판’ 논란도 계속
시청자의 잣대가 과도해 오히려 콘텐츠 생태계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는 시각도 많다. 군중 심리 탓에 표현의 자유 및 상상력을 억압할 수 있고, 일률적 역사 및 가치관을 세뇌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공학부 교수는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온라인 비판 문화를 인민재판과 비교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당신들은 이미 동북공정에 세뇌된 것이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무슨 콤플렉스가 이리 심한가? 픽션 드라마가 다큐멘터리로도 아니고. 이렇게 무섭게 흥분한 민중을 활용한 정치가 모택동의 문화혁명이고 김일성의 인민재판”이라며 “군중 심리로 작가들의 상상력을 억압하고 대중이 인정하는 ‘하나의 역사’만 말하고 가르친다. 인터넷이 인민 재판 시에 휘둘렀던 우중의 낫과 몽둥이가 되고 있다”고 썼다. 이어 “중국이 한국 픽션 드라마를 증거로 동북공정의 근거로 삼을 만큼 어리석은 나라인가”라며 “과잉반응이야말로 이미 동북 공정이 성공하고 있다는 방증인지 모른다. 종족주의적 어리석은 애국심들이 넘쳐난다”고 적었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국 TV 역사 드라마는 몇몇 등장인물 외는 완벽한 판타지다. ‘대장금’에 나오는 음식은 조선에 있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글을 게시했다. 이후 비판이 쏟아지자 재차 게시물을 올려 “판타지면 판타지로 보고 말지 뭔 역사 타령인가”라며 “조선궁중음식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한 보고서에 일본 음식이 올라가 있는 거 아시냐. 판타지 드라마 보고 흥분하지 말고 엉터리 조선궁중음식무형문화재나 바로 잡자고 외쳐라. 역사 공부 엉터리로 하셨다”고 썼다.

제작진들은 지금의 논란을 뼈아프게 받아들이면서도 창작 생태계가 위축될까 우려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시청자의 기준이 날카로워져 이전보다 훨씬 더 꼼꼼하게 검토하고 있다”며 “하지만 단순 실수도 의도적인 연출로 여겨져 위축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다른 관계자는 “방송을 만들 때 자문을 여러 차례 받으며 감수성을 따라가려 노력하고 있다”며 “하지만 논란이 될 바에는 아예 시도도 하지 말자는 의견이 많아 콘텐츠 질 하락이 걱정될 때가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결국 콘텐츠를 생산하고 심판을 받아야 하는 제작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 관계자는 “방송가는 매체와 시청자의 상호 소통이 가능해진 단계에서 성숙한 상호작용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며 “제작진이 아직 대중의 감수성 못 따라오고 있어 자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시청자 역시 여론에 휩쓸리지 않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눈을 기르길 당부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