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사업에 재진출을 선언한 인텔이 ‘미국·유럽의 생산 거점화’를 천명했다. 아시아에 생산기지가 편중돼있는 현 상황에서 벗어나 서방에서도 반도체를 주도적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25일(현지시간) BBC와의 인터뷰에서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80%를 아시아가 독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세상은 훨씬 더 균형잡힌 공급체인을 필요로 한다. 그 과정을 인텔이 이끌겠다”고 밝혔다.
그는 반도체의 중요성이 모든 일상에서 두드러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통신과 의학, 노동, 교육, 교통 등 분야에서 디지털화가 이뤄지고 있는데 그 근간은 반도체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뭔가를 제조한다는 것에 있어서는 결국 생산 규모가 중요하다”면서 “만들어내는 총량에서 밀리면 뒤처지게 된다. 우리가 보유한 최신 기술을 동원해 경쟁에서 이겨 보이겠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TSMC와의 경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겔싱어는 “현재 세계적인 반도체 시장 규모는 1000억달러(약 113조원)에 달한다”면서 “두 업체만으로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도체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두 업체와 하려는 건 무조건적인 경쟁(competition)이 아닌 ‘협력적인 경쟁(co-op-petition)’”이라면서 “가끔은 경쟁을 할 수밖에 없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서로의 제품을 쓰기도 할 것”이라고 전했다.
삼성전자와 TSMC와의 차별점으로 지리점 이점을 들고나오기도 했다. 현재 아시아에 편중된 반도체 생산체계에서 벗어나 미국·유럽 중심의 생산거점을 만드는 데는 인텔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설명이다.
현재 인텔은 미국 오리건주와 아일랜드, 이스라엘에서 신규 공장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0억달러를 들여 애리조나주에도 두 개의 공장을 세울 계획이다. 겔싱어는 이들 외에도 유럽의 한 국가에 부지를 마련해 새 공장을 건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텔이 새로 생산할 반도체의 잠재적인 고객으로는 애플과 엔비디아, 퀄컴, 브로드컴 등을 꼽았다. 마이크로소프트와 IBM도 후보에 올랐다.
“애플 등 일부 기업은 자체 생산한 칩을 쓰겠다는 입장이 아닌가”라는 기자의 지적에는 “모든 기업은 다중적인 공급 체계를 갖추길 원한다”면서 “결국엔 내 잠재력의 문제가 될 것이다. 내가 그 기업에 찾아가 우리 제품을 쓰도록 요구할 능력이 있다면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답했다.
인텔의 이같은 반도체 생산 전략은 최근 미국 조 바이든 정부가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와 관련해 공급망 재검토를 지시한 가운데 나왔다.
인텔은 과거에도 파운드리 사업에 나섰으나 별다른 소득을 보지 못하고 자체 상품 생산에만 안주해왔다. 하지만 2009년까지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맡았던 겔싱어가 12년만에 화려하게 복귀하며 다시 파운드리 사업에 다시 뛰어들었다.
로이터통신은 “겔싱어 CEO의 움직임은 인텔이 지난해 반도체 사업에서 부진한 결과를 내며 주가가 폭락했던 굴욕적인 과거를 지우는 데 목표가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유럽이 중국과의 마찰을 우려해 균형 잡힌 기술적 헤게모니를 탈환하려는 목적이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반도체 시장을 양분하는 TSMC와 삼성전자가 모두 중국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는 국가들에 있다는 이유다. 미국은 특히 대만이 중국의 직접적인 위협 아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