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 그리는 분들이 특히 관람하러 많이 와요. 수요가 많아 리플릿을 별도로 만들었다니까요.”
서울 중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지난 2월 중순부터 미국에서 환수한 ‘호렵도 팔폭병풍(胡獵圖 八幅屛風)’(이하 호렵도)을 18일부터 박물관 내 궁중 서화실에서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24일 “예상 못 한 현상”이라며 이같이 전했다.
‘오랑캐(胡)가 사냥하는(獵) 그림’을 뜻하는 호렵도는 청나라 황제가 사냥을 즐기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 화려한 궁중 서화를 민화 작가들이 보려고 몰려오는 이유는 뭘까. 결론부터 말하면 금박까지 한 궁중용 호렵도가 민화로 그려져 시중에 대유행했기 때문이다.
때는 조선 22대 왕 정조(1752-1800) 시절. 이전까지 청의 침입으로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연이어 겪은 조선에서는 청을 배척하는 의식이 강했다. 특히 청에 볼모로 잡혀갔다 온 효종은 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을 정벌하는 북벌 계획까지 세웠다. 현실성이 부족한 정책 탓에 조선은 오히려 문화적 쇄국주의에 빠지는 부작용을 겪었다. 130여년 뒤 정조는 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18세기 후반 청의 문물이 대거 유입되며 청나를 다녀온 기록인 연행록이 크게 유행했다. 홍대용, 박제가, 박지원 등 젊고 진보적인 지식인 사이에선 청을 배우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른바 북학파다. 청나라 황제의 사냥 그림인 호렵도는 이 시기에 궁중에서 정책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무를 통해 나라를 지키자는 정조의 국토 수호의 의지를 담은 그림이기도 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1812년 규장각 자비대령화원 녹취재 시험에 출제된 그림 제목으로 호렵도가 등장한다고 정병모 전 경주대 교수는 전한다. 자비대령화원은 정조가 도화서와 별도로 친위대처럼 설치한 화원 제도다. 화원 중의 화원을 뽑아 수시로 치르는 미술시험인 녹취재야말로 정조의 통치 철학을 알 수 있다. 문인 조재삼이 쓴 ‘송남잡지’에는 김홍도가 호렵도를 처음 그렸다는 내용도 나온다. 김홍도는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화원 화가다.
이번에 전시하는 ‘호렵도 팔폭병풍’에도 나뭇가지 표현에서는 김홍도의 필치가, 바위에는 김홍도와 라이벌이었던, ‘강산무진도’의 화가 이인문의 필치가 느껴진다고 김현정 학예연구관은 말했다. 정 교수는 특히 “가지 끝이 뭉툭하게 물이 오른 나무, 방금 멈춰서서 살짝 앞으로 내민 말발굽 등 디테일에서 김홍도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중국 황제가 가을에 군사훈련을 겸해 실시한 사냥 장면을 담은 이 호렵도 병풍 그림의 구성은서 사적이다. 중앙에 흰 용이 새겨진 청색 복식을 한 청 황제, 호랑이와 사슴을 향해 활을 겨누거나 창과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용감한 사냥꾼, 그들을 위해 사냥감을 몰아주는 개 등 사냥 장면이 역동적으로 묘사돼 있다. 또 가마를 타고 응원하러 온 왕실 여인들, 만약을 대비해 망 보는 호위병들까지 아주 디테일하다. 인물은 채색, 주변 산수는 수묵으로 표현한 방식도 흥미롭다.
왕실은 유행의 진원지다. 정조가 좋아했던 책거리 그림이 민가에서 대유행했던 것처럼 호렵도 역시 19세기 이후 민화로 제작돼 집집마다 내걸렸다.
그런데 호렵도가 민가로 퍼져나가며 그 제작 목적은 180도 바뀐다. 처음 정조의 지시로 제작된 호렵도에는 청의 선진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의 열망, 국토를 지키겠다는 호국의 철학이 담겼다면 민화 호렵도에는 액을 막고 부자가 되겠다는 서민들의 욕망이 담겼다. 길상화로 그 성격이 바뀐 것이다.
민화 호렵도에는 황제의 친위병에 뜬금없이 말을 타고 있는 원숭이가 보인다거나, 사자와 불가사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사자와 불가사리, 원숭이는 모두 서수(瑞獸), 즉 상서로운 동물이다. 액을 막기 위해 그려지는 캐릭터로, 백수의 왕인 사자는 왕릉을 지키는 수호 동물로 중국에선 궁궐, 사찰, 집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코끼리처럼 코가 긴 불가사리는 쇠를 먹으며 나쁜 기운을 쫒는 것으로 여겨진다. 부를 상징하는 꽃인 모란까지 호렵도에 생뚱맞게 등장하기도 한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는 장면도 있다. 사냥의 대상인 호랑이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여유롭게 담배 피는 배짱이야말로 억압받는 민중들에게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이처럼 호국의 궁중 호렵도는 민화로 사랑받으며 해학 넘치는 서민용 행복 그림이 됐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