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연합군 포로를 사령부 방패막이로 활용했다

입력 2021-03-22 10:22
일제 패망으로 경성연합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한국인들과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영국군 포로들.

서울 용산구가 일제의 경성연합군포로수용소(KEIJO CAMP)에 수감됐던 연합군 전쟁포로 명부를 발굴했다고 22일 밝혔다. 명단에는 총 158명의 연합군 포로 중 미군 장교 2명, 영국군 141명(장교 91명, 준사관 2명, 사병 48명), 호주군 15명(장교 6명, 사병 9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문서는 연번, 이름, 계급, 군번(ASN), 국적 순으로 정리가 됐으며 총 4페이지 분량이다. 원출처는 미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이며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이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전자사료관’에서 해당 문건을 찾아냈다.

경성연합군포로수용소 전쟁포로 명단.

경성연합군포로수용소는 아시아·태평양전쟁(1941~1945년) 시기 말레이 전투(1942년)에서 일본군 포로가 된 연합군 병력을 일부 수감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시설이다. 개설 일자는 1942년 9월 25일이고 위치는 용산 청엽정(靑葉町, 현 청파동) 3정목 100번지(현 신광여중고 부지)였다. 과거 이와무라(岩村) 제사공장 창고로 쓰였던 건물을 증개축했다.

주한미군사(HUSAFIK) 등 자료에 따르면 1000여명에 달하는 연합군 포로들이 싱가포르에서 출발해 9월 22일 부산 도착, 9월 25일 기차 편으로 일부는 영등포에서 분할되어 인천 포로수용소로 갔고 영국군 엘링톤 중령 등 158명은 용산에 도착했다. 영국인 장교와 부사관, 호주인 장교와 부사관이 별도의 내무반(총 12개)으로 편성됐으며 수용소 총책임자는 일본군 노구치(野口讓) 대좌(현 대령계급)였다. 일제는 연합군 폭격으로부터 자신들의 군사·철도기지와 일본인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용산 일본군사령부 바로 옆에 백인 포로수용소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포로를 ‘방패막이’ 삼았던 것이다.

정치적 선전 효과도 노렸다. 당시 일제는 한반도 내 경성, 인천, 흥남 3곳에 수용소를 설치했는데 이는 조선인의 백인 존경 관념을 없애고 자신들의 우월성을 조선인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됐다. 경성의 포로들은 주로 일본군 육군창고(현 캠프킴 부지), 경성역(현 서울역), 한강다리 등에서 강제노역을 했으며 감시원들로부터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일부는 다치거나 병에 걸려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고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1945년 일제의 패망과 동시에 포로 석방 절차가 진행됐다. 한반도에 진주한 미 제24군단은 연합군 포로들을 석방하기 위해 포로인수팀을 배속 받았다. 스텐겔 포로인수팀장(대위)은 9월 3일 오키나와에서 출발, 6일 김포비행장에 도착했으며 조선철도호텔에서 노구치 대좌를 만나 포로수용소 목록, 포로 명부를 인계 받았다. 포로들이 전부 풀려나는 데는 3일이 더 걸렸다. 포로들이 풀려난 뒤 해당 수용소는 학교로 용도가 바뀌었으며 1946년 신광기예초급중학교가 이곳에 들어섰다. 지금은 신광여중고가 됐다. 남아있던 수용소 건물은 2011년 철거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천수 실장은 “수용소 철거 당시 벽돌 한 장이라도 남겨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삼았으면 좋았을텐데 안내판 하나도 없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재중 선임기자 j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