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 맘’ 참변…코로나 실직 이후 ‘스파’ 새 일자리 구했다가

입력 2021-03-21 08:57 수정 2021-03-21 10:19
유모(63)씨, 지난해 실직했다가 일자리 구하자 기뻐해
차남 “일자리 없어도 집세 없는 사람들에 현금 줘”
한인 그랜트(51)씨, 두 아들 대학등록금 내는 ‘싱글 맘’
“희생자들, 한국·중국 등서 와 가족 위해 돈 벌었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시내에 마련된 총격 사고 희생자를 위한 임시 추모장소에 꽃다발들과 함께 ‘아시아인들에 대한 증오를 중단하라’ 등의 글귀가 쓰인 종이들이 19일(현지시간) 놓여있다. AP뉴시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스파에서 일하다가 총격을 받아 숨진 한인 여성 유모(63)씨는 마사지 치료사 자격증을 갖고 있었다.

유씨는 코로나19로 인해 지난해 일자리를 잃었다가 ‘아로마세라피 스파’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자 너무 기뻐했다고 유씨의 두 아들이 애틀랜타 지역 언론 ‘애틀랜타 저널 컨스티튜션(AJC)에 말했다.

특히 유씨는 자신이 일자리가 없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에게 음식과 선물, 꽃을 주고 집세가 없는 사람들에겐 약간의 현금을 주기도 했다고 유씨의 장남 엘리엇 페터슨(42)씨가 AJC에 전했다.

유씨는 미군이었던 남편을 만나 1980년대 조지아주로 이주했다. 차남인 로버트 패터슨(38)씨는 AJC에 “우리 어머니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그녀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지역주민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수사당국은 애틀랜타의 마사지·스파 업소들에서 지난 16일 발생한 연쇄 총격 사건으로 숨진 한인 여성 4명의 신원을 공개했다.

유씨를 포함해 박모(74)씨, 김모(69)씨, 미국 성(姓) ‘그랜트’를 가진 51세 여성이었다. 외교부는 개인정보 보호와 유가족의 요청을 감안해 구체적인 개인정보는 밝히지 않을 방침이다. 다만, 외신들에 따르면, 그랜트씨는 한국 국적을 보유한 영주권자이고, 나머지 3명은 미국 국적인 시민권자로 추정된다.

뉴욕타임스(NYT)는 그랜트씨의 사연을 1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두 아들의 대학 등록금과 집세, 갖가지 영수증을 감당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해야 했던 ‘싱글 맘’이었다.

둘째 아들 에릭 박(20)씨는 “어머니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면서 “한국 음식점에서 함께 먹은 순두부 찌개와 어머니가 만들어준 김치찌개를 떠올렸다. 그랜트씨는 에릭씨가 요리사가 되기를 원했으며 장남 랜디 박(22)씨와 함께 세 명은 끈끈한 가족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NYT는 전했다. 에릭씨는 “이제 (형과) 둘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랜트씨는 차가 없는 데다 통근 거리가 멀어 직장이었던 골드 스파 또는 직장 인근 친구 집에서 묵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그랜트씨는 일이 끝나면 매일 두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총격 사고 전날인 15일 저녁에 나눴던 전화통화가 마지막이 됐다. 랜디씨는 어머니가 잘 지내는지, 밥은 먹었는지를 물어본 뒤 “굿 나잇(잘 자라)”이라는 인사를 전했다고 회상했다.

차남 에릭씨는 “나는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일했던 것을 알고 있다”면서 “그래서 어머니가 우리 곁에 없어도 화가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NYT는 그랜트씨가 애틀랜타 도심의 ‘골드 스파’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선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았고, 화장품 가게에서 일한다고 말하기를 선호했다고 전했다.

한인 여성이 아닌 희생자들도 저마나 안타까운 사연을 지니고 있다. 이번 총격 사고로 숨진 피해자는 모두 8명이다. 이 중 한인 여성은 4명이었고, 다른 아시아계 여성도 2명이 사망했다. 백인 여성과 남성도 각각 1명씩 숨졌다.

중국 출신인 탄 샤오제씨는 애틀랜타 교외에서 ‘영스 아시안 마사지’라는 가게를 운영하다가 숨졌다. 탄씨의 친구 애슐리 장은 NYT에 “탄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일했다”면서 “우리는 ‘아메리칸 드림’이 실현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마사지 가게 종업원이던 아시아계 여성 다오위 펑(44)씨도 근무한 지 수개월 만에 총탄에 맞아 변을 당했다.

마사지 가게 고객인 백인 여성 딜레이나 애슐리 욘(33)씨 남편과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가 목숨을 잃었다. 같이 가게를 찾았던 남편은 다른 방에 있어 다행히 목숨을 구했다.

욘은 인근 와플 가게에서 오래 일했으며, 그곳에서 손님으로 오던 남편을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 이 부부는 데이트 삼아 마사지 가게를 찾았다고 NYT는 보도했다.

폴 안드레 미컬스(54)씨는 이번 총격 사건의 유일한 백인 남성 희생자다. 전기 기술자로 디트로이트 출신인 미컬스씨는 사업을 위해 이 지역에 정착했다.

중태에 빠진 엘시아스 에르난데스-오르티스(30)씨는 과테말라 출신 이민자다. 스파 바로 옆에 있는 환전소를 찾았다가 총탄에 맞았다. 그는 고향의 가족에게 송금하기 위해 환전소를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져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NYT는 “희생자들과 피해자는 한국에서, 중국에서, 과테말라에서, 그리고 디트로이트에서 왔다”면서 “그들은 자녀와 심지어 손주들을 위해 돈을 벌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